2 - 우리 제대로 여행할 수 있을까요?
아이들과 신랑의 방학 보충이 끝나는 날 저녁, 우리는 그동안 준비했던 모든 것과 며칠 전부터 싸놓았던 짐을 끌고 북경 국제공항으로 향했다. 퇴근 시간의 교통체증이랑 시간이 겹칠까 봐 좀 여유롭게 도착해서 짐 부치고 밥을 먹자는 생각이었는데 길도 막히지 않아 비행기 시간을 3시간도 더 남겨두고 공항에 도착했다. 안내하는 사람의 도움을 받아 무인시스템에서 보딩패스도 무사히 출력할 수 있었다. 예상대로 일이 척척 진행되어 타국에서 여행하는 것도 별 거 없다는 생각도 들었다.
시간이 되어 짐을 부치기 위해 공항직원에게 표와 여권을 내밀었다. 그러자 공항 직원이 뭐라고 한다. 무슨 얘기인가 싶어 봤더니 여권의 이름이랑 비행기표의 이름이 달라서 수속을 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놀라서 표를 확인하니 비행기표의 이름이 한자 이름의 중국식 발음으로 표기되어 있어서 여권상의 이름(영문)과 달라진 것이었다. 즉, 내 여권상의 이름은 'YOUN SUN KI'인데 비행기표의 이름은 '尹善基'의 중국식 발음 'YIN SHAN JI'로 되어 있던 것이다. 중국에 워낙 잘 적응하신 신랑이 중국의 온라인 티켓 구매 사이트인 '취나얼'에서 비행기표를 구매할 때 중문 이름란에 아무 생각 없이 우리의 한자 이름을 넣은 게 문제였다. 사실 처음에 우리는 이 사건의 중대함을 몰랐다. "'YOUN SUN KI'도 내 이름이고 'YIN SHAN JI'도 내 이름이다." 이렇게 설명하면 될 줄 알았다. 그러나 공항직원은 여기서는 괜찮아도 보안검색대에서 통과할 수 없다고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그럼 항공사를 통해서 바꾸면 되지 싶어 공항직원이 알려 준 대로 동방항공 콜센터로 전화를 했다. 그런데 도대체 전화 연결이 되지 않는다. 전화를 하다 하다 공항 한 구석에 있는 동방항공 카운터로 가서 사정을 말했다. 우리도 영어를 그다지 잘 하지 못한다마는 우리보다 더 영어를 알아듣지 못하는 직원이, 여기서는 고쳐줄 수 없단다. 여기서 표를 새로 끊으란다. 그럼 항공사에 전화라도 해달라고, 도대체 콜센터 연결이 되지 않는다고 아무리 얘기해도 단호함의 극치. 너희가 전화를 하든지, 여기서 표를 끊든지 하란다.
다시 공항 한구석 의자에 앉아서 전화를 하다 하다 혹시나 싶어 영어로 연결되는 콜번호로 전화하니 어렵사리 통화가 되었다. 또 무한 반복, 영어를 그다지 잘하지는 않는 우리와 우리보다 영어를 더 잘 못 알아듣는 콜센터 직원이랑 한참을 실랑이를 벌이고 있으니 옆에 앉아 있던 남학생이 '도와 드릴까요?'한다. 이런 구세주 같으니라고.... 한국교포라면서 우리 사정을 듣더니 대신 전화 통화를 해줬다. 그 직원이 우리가 표를 체크 아웃하고 다시 연락을 하면 고쳐주겠다고 했단다. 그래서 또 다시 무인발급 시스템으로 달려가 안내하는 사람의 도움을 받아 티켓을 체크 아웃(취소시키는 거였음)하고 돌아왔다.
그리고 다시 그 어려운 콜센터 연결. 어렵사리 통화가 되었으나 아까 전화받았던 직원이 아닌 다른 직원. 또다시 영어를 그다지 잘하지 못하는 우리와 우리보다 영어를 더 잘 못 알아듣는 콜센터 직원이랑 지금까지의 상황을 다시 버벅거리며 설명하는 과정을 걸쳤으나 대답은 노. 이름을 바꿔 줄 수는 없단다. 신랑이랑 큰 딸이 번갈아 가며 계속 그렇게 직원과 실랑이를 벌이고 있는데 '이것들이 우리가 말도 제대로 못 하는 외국인이라고 지금 서비스가 이 모양인가?' 싶어 인터넷 검색을 해 보았다.
'비행기 표 이름 수정'
아뿔싸, 그때서야 알았다. 비행기표 이름이 틀린 것은 중국에서나 한국에서나 절대 수정할 수 없다는 것을, 취소하고 새 표를 끊는 방법밖에 없다는 것을... 그제야 상황 파악이 된 우리는 '취나얼'에 들어가 취소 환불 버튼을 눌렀고 그때는 이미 비행시간이 임박한 때라 엄청난 취소 수수료를 내야 했다. 비행시간 2시간 전에만 취소했더라면 그래도 웬만큼 환불을 받을 수 있었는데 여기저기서 실랑이를 벌이느라 비행시간은 이미 1시간 여 밖에 남지 않은 상태였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우리가 예매한 가격의 2배를 주고 4명의 비행기표를 다시 끊어야 했고. 아, 이 쓰린 속이여.... 비행기표 아끼겠다고 검색에 검색을 거듭하여 미리 끊어놓은 노력은 모두 물거품이 되어버렸구나.
어쨌든 여행은 떠나야 했기에 새 비행기표(엄청나게 비싼...)를 들고 보안검색대를 통과하는데 얼마 전에 공항에서 테러가 있었던 여파로 검색에도 한참이 걸렸다. 공항에서 여유롭게 저녁 먹고 출발하겠다는 계획과 달리 그때까지 밥은커녕 정신이 반은 나간 상태로 탑승 게이트에 도착하니 여유시간은 10분 정도. 눈 앞에 보이는 편의점에서 컵라면으로 저녁을 때우는데.... 화가 났다 웃음이 피식 새어 나왔다, 정말 이런 파란만장한 여행의 시작이라니.
가족들도 그제야 '여유롭게 공항에 도착했으니 망정이지 비행기 못 탈 뻔했다'느니, '우리 비즈니스석 가격으로 비행기 타게 생겼다느니' 농담을 할 여유가 생긴 것 같았다. 그래, 비행기 못 타고 여행 출발도 못 했음 어쩔 뻔했어. 이렇게라도 출발하게 된 게 다행이지 싶다가도 지금까지 타들어간 속이며 이미 펑크 나기 시작한 예산이며 불쑥불쑥 떠오를 때면 머리 끝이 쭈뼛 서는 느낌이었다.
그렇게 대단히 어렵사리 북경공항을 출발해서 새벽 2시쯤 쿤밍공항에 도착했다. 처음 가보는 도시에 새벽에 떨어지는 게 부담스러워서 미리 우리가 묶을 한인 게스트 하우스에 유료 픽업 차량을 예약해 놓았었다. 약속대로 만난 차량에 올라서 우리말이 통하는 한국인 사장님과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음에 한시름 놓고 있었다.
대부분의 윈난 여행객들이 윈난성의 성도(省都)인 이 곳 쿤밍에서 윈난 여행을 시작한다. 우리도 여행에 대한 도움도 받고 궁금한 것들도 물어보고 할 요량으로 일부러 쿤밍의 숙소는 한인 게스트 하우스를 검색했었다. 여러 개의 한인 게스트 하우스 중 좋은 평가의 후기도 많고 연락을 했을 때 답신도 친절하게 보낸 온 곳으로 선별해서 예약을 했다. 그래서 기대가 컸던 탓이었을까? 아니면 출발 소동에 너무 지쳐 내가 모든 것을 삐딱하게 보기 시작한 것일까?
운전을 하면서 신랑과 이야기를 나누는 사장님의 관심은 오로지 우리가 무슨 선택 관광을 할 지에 쏠려 있는 것 같았다. 여러 가지 이야기를 나누어 본 결과 우리는 오로지 숙소 이용과 마지막 날 구향동굴과 석림 관광을 위한 빵차(영업 신고하지 않고 개인이 운영하는 영업용 차) 예약 밖에 한 게 없음을 확인하고는 무척 객관적이 되어버린 사장님. 여행에 대한 여러 가지 경고를 날리기 시작했다. 숙소 예약을 전화로 다 확인했느냐? '취나얼'이나 '씨트립' 이런 인터넷으로 예약한 것 다 소용없다. 갔을 때 객잔(중국 식 숙소) 주인이 방 없다 하면 그만이다. 호도협? 지금 사람 많아서 가기 힘들다. 미리 예약했어야 한다. 리장? 기대하지 마라. 여기저기 많이 당할 거다. 사장님? 우리 보고 지금 여행하지 말라는 이야기인가요? 내가 느끼기에 사장님의 결론은 자기를 통해 예약하고 관광하는 게 가장 믿음직한데 왜 안 했냐 그것이다. 그만 좀 하세요. 이미 우리는 많이 지쳤다고요. T.T
그나마 사장님을 통해 도움을 받은 것은 동방항공 사무실의 위치를 알려줘서 돌아올 비행기표를 다시 취소하고 새로 끊어놓을 수 있었다는 점 정도. 그 이후로는 우리가 본인 사업에 별 도움이 못 된다고 판단하셨는지 아님 정말 눈 코 뜰 새 없이 바쁘셨는지 3박 4일 동안 뵌 적이 없다는... '하루 여행을 끝내고 게스트 하우스로 돌아와 여러 사람들이랑 이야기를 나누며 맥주를 마신 일이 제일 즐거웠다'는 내용이 주를 이뤘던 그 아름답던 인터넷 후기들의 내용은 우리와는 전혀 관계없는 일이 되어버렸다. 냉장고에 가득 채워져 있으니 얼마든지 꺼내 먹으라던 무료 맥주는 생전 처음 보는 '파인애플 맥주', 음료수는 고 카페인 음료라 손도 대 보지 못했고. 그렇죠, 우리의 까다로운 입맛을 탓해야겠지요... 한국인들끼리의 아늑함과 편안함을 예상했던 쿤밍에서의 숙소는 여행 일정 중 가장 최악의 숙소가 되어버렸다.
오전까지 잠도 자고 쉬다가 신랑은 비행기표 처리와 오후에 도착하기로 되어 있는 조카를 데리러 나가고 여자들 셋이서 쿤밍 여행의 첫 일정으로 '추이후공원(翠湖公園, 취호공원)'에 가기 위해 나섰다. 바이두 지도 검색으로 버스 노선을 확인하고 버스에 올라탔는데 사람도 별로 없어 참 한적하구나 싶었다. 그런데 버스가 터미널 같은 곳으로 들어가더니 기사가 우리 보고 내리란다. 우리가 멍하고 있으니 종점이란다. 뭔가 싶어 확인해보니 이런 바보 같으니라고. 반대편 버스를 탔어야 하는데, 종점 들어가는 버스를 탔으니 내리는 사람만 있고 타는 사람은 없었지... 황망히 버스에 내려 다시 검색해보니 다행히 그 터미널에서 출발하는 버스가 있었다. 조금 후 기다리던 버스가 왔는데 우와, 이층 버스다. 사람도 없어 우리는 이층 맨 앞자리를 차지할 수 있었다.
버스에서 내려 지도가 알려주는 대로 걸어가면서 사진도 찍고 구경도 하고 가고 있는데 갑자기 사람들로 복잡한 사거리가 나타났다. 무슨 일인가 싶어 봤더니 사거리 앞에 동물원이 있어서 아이들을 데리고 나온 나들이 인파들이 북적거리고 있던 것이다. 얼른 지나가야지 싶어 애들을 재촉해서 걷고 있는데 큰 아이가 '엄마 내 핸드폰!'하면서 울쌍을 짓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 복잡한 사거리를 지나는 사이 또 소매치기를 당한 것이다. 지난 6월 내몽고 여행 때 소매치기당한 이후로 다시 구입한 지 이제 한 달 조금 넘었나 싶은 핸드폰을 또 소매치기당한 것이다. 그것도 매번 여행의 시작 지점에서.... 이번엔 나도 화가 나서 좀 잘 챙기지 그랬냐며 소리를 질렀는데 두 번이나 소매치기를 당한 큰 아이는 눈에서 눈물까지 떨구고 있었다. 아, 정말 이번 여행 '파란만장, 좌충우돌' 딱 맞는 말이다.
그러나 어떡하랴, 이미 남의 손에 들어가 버린 것을... 그냥 잊어버리고 구경이나 하자 싶어 공원 여기저기 돌아다녔으나 우리의 축 늘어진 모습은 흡사 패잔병들 같았다. 여행 시작부터 벌써 10살은 늙어버린 듯한 느낌.
이 곳 취호공원은 호수를 둘러싸고 건설된 쿤밍 최대 규모의 공원으로 맑은 호수와 식물들의 푸른 잎사귀가 아름다워 '추이(翠 비취색, 청록색) 후(湖 호수)'라고 불린단다. 사시사철 언제든 시민들의 휴식처로 사랑을 받는다고 하더니 정말 사람들이 많았다. 그러나 우리는 예쁜 것을 봐도 예쁜지도 모르겠고, 한 없이 우울하기만 하고. T.T
배는 고픈데 적당한 식당을 찾지 못해 한참을 헤매다가 결국 호수 한쪽 끝에 자리 잡고 있는 식당에 무작정 들어갔다. 호숫가 바로 앞이라 전망이 참 좋았다. 먹을 것을 시켜놓고 앉아 있으니 조금씩 마음도 안정되는 느낌? 물론 중국어로 된 메뉴판에서 그림만 보고 메뉴를 고르다가 실수로 개구리 고기를 시킬 뻔하기 했으나 나온 음식도 먹을 만하고 특히나 처음 시켜 본 맥주가 맛이 나서 힘이 불쑥. 역시나 사람은 힘들수록 먹어야 힘이 나는 법.^^
돌아오는 길에 사람들이 줄 서 있는 꼬치집 발견. 애들이 좋아하는 오징어 꼬치가 있는 것을 보고는 우리도 얼른 줄을 서서 꼬치를 사겠다는 강한 의지를 보이고 있었는데 자세히 보니 우리가 선 줄은 돈가스 같은 튀김을 사는 줄이었다. 오징어 꼬치는 그냥 그 앞에서 달라고 하면 주는 것이고. 도대체 아직까지 중국의 줄 서기는 감을 잡을 수가 없다. 줄을 잘 못 서서 조금 시간이 걸리기는 했으나 오징어 꼬치는 지금까지 먹어 본 것 중 최고였다. 역시 사람들이 많은 곳은 이유가 있는 법이다.^^ 오징어 꼬치에 더욱 힘을 얻어 게스트 하우스로 씩씩하게 돌아가는 세 여자. 제발 이제 우리도 평화롭고 여유로운 여행을 시작하자꾸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