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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물마루 Oct 03. 2016

결혼이라는 환상

낭만적 연애와 그 후의 일상, 알랭 드 보통, 은행나무

   오랜 시간을 함께 한 친구가 구호물품을 보내왔다.^^ 책을 좋아하는 네가 거기서 얼마나 적적하게 지내겠냐고 걱정하는 마음과 함께. 아이들이 엄청 좋아한 한국 과자와 읽고 싶었던 책들이 박스 가득히 들어있었다. 덕분에 난 또 오랜만에 접하는 종이책에 행복한 사람이 되었고. 고맙다 친구야!


   그렇게 받은 귀중한 책 중 아껴 아껴 읽은 것 중 하나가 [낭만적 연애와 그 후의 일상]이다. 그렇지 않아도 한국인이 좋아하는 외국 작가 중 한 사람인 알랭 드 보통의 새 장편소설이 나왔다는 이야기에 몸이 들썩들썩하고 있었는데, 이렇게 종이책으로 밑줄 그어가며 읽을 수 있어서 얼마나 기쁜지... [우리는 사랑일까], [나는 왜 너를 사랑하는가]를 읽으며 연애소설도 이렇게 지적일 수 있구나 감탄했던 작가가 쓴 새로운 연애소설이라 기대와 설렘으로 책장을 넘겼다. 읽으면서 정말 원 없이 밑줄을 그었다.^^


   그 전의 소설들이 '연애'의 일상을 깨뜨리는 이야기였다면 이번 소설은 연애 그 후의 일상인 '결혼'에 대한 우리들의 환상을 깨뜨리는 이야기이다. 지난번 읽었던 [다시, 책은 도끼다]에서 이야기 한, 커튼이 가려진 그 후의 이야기에 초점을 맞춘 소설이라고 할 수 있겠다. [콜레라 시대의 사랑]의 현대판이라고 할까?


낭만적 믿음은 항상 존재해왔지만 몇 세기 전에야 비로소 병이 아닌 어떤 것으로 판정받았다. 영혼의 짝을 찾는 일이 인생의 목적에 근접한 어떤 것으로서의 지위를 갖추게 된 것은 최근이었다. <중략> 이 변화는 표면상으로 인간적이고 관대해 보이지만 꺼림칙하고 상처 입기 쉬운 결말에 이를 부담을 안겨준다. 거리에서, 사무실에서, 비행기 옆자리에서 상상력이 풍부한 관찰자에게 언뜻 비친 듯한 누군가의 완벽함이 평생토록 유지되기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 1부 낭만주의, 매혹, p15

   결혼 적령기의 우리는, 아니 연애를 할 나이의 우리들은 영혼의 짝을 찾을 수 있다는 낭만적 믿음에 사로잡힌 상상력이 뛰어난 관찰자들이다. 그 풍부한 상상력과 온몸의 감각을 총동원하여 상대를 찾는다. 어쩌다 눈에 띈 매력적인 면이 관찰자들에게 포착되면 그 이후의 일은 모두 관찰자의 몫이다. 그렇게 관찰자가 만들어 낸 완벽히 매력적인 대상은, 설사 신이라 하여도 완벽한 캐릭터 일치가 불가능하다. 그런데 우리는 바로 그 완벽히 매력적인 대상과 사랑에 빠지고 결혼을 결심한다는 게 바로 비극의 시작인 것이다.

한때 그가 낭만이라 보았던 것--무언의 직관, 순간적인 갈망, 영혼의 짝에 대한 믿음--이 두 사람의 관계를 어떻게 유지하는지를 배워가는 데 방해가 된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사랑을 유발했던 신비한 열정으로부터 눈을 돌릴 때 사랑이 지속될 수 있음을, 유효한 관계를 위해서는 그 관계를 처음 빠져들게 한 감정들을 포기할 필요가 있다는 결론에 이를 것이다. 이제 그는 사랑은 열정이라기보다 기술이라는 사실을 배워야만 할 것이다.   ----- 1부 낭만주의, 매혹, p16
그러나 당연히, 그는 아직 첫걸음도 떼지 못했다. 그와 커스틴은 결혼을 하고, 난관을 겪고, 돈 때문에 자주 걱정하고, 딸과 아들을 차례로 낳고, 한 사람이 바람을 피우고, 권태로운 시간을 보내고, 가끔은 서로 죽이고 싶은 마음이 들고, 몇 번은 자기 자신을 죽이고 싶은 마음이 들 것이다. 바로 이것이 진짜 러브스토리다.   ----- 1부 낭만주의, 신성한 시작, p28

   우리가 사랑을 시작했을 때의 그 열정과 감정들에서 벗어날 때야 비로소 관계를 유지할 수 있는 것, 서로 죽이고 싶은 마음을 넘어서, 몇 번은 자기 자신을 죽이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것, 이것들이 바로 진짜 러브스토리인 '결혼의 일상'이다. 정말 탁월한 표현이다. 내가 왜 스스로 내 발등을 찍었나 싶은 생각에 접시물에 코 박고라도 죽고 싶은 마음이 불쑥불쑥 드는 건 나만이 아닐 것이라 믿는다. 그럼 왜 도대체 사람들은 결혼을 하는 것일까? 작가는 라비와 커스틴이라는 남녀 주인공의 연애와 결혼 이야기와 그에 대한 작가의 에세이를 적절히 섞어가며 그 답을 찾아간다. 사실 이 소설에 나오는 주인공들의 이야기는 위에서 소개한 내용이 전부이다. 소설 초반에 소설의 내용을 다 밝히고도 소설을 흥미롭게 끌고 나가는 작가의 대단한 능력이 경이로울 뿐이다.


사랑의 초기 단계에는 반드시 감추는 게 적절해 보였던 많은 비밀을 마침내 드러낼 수 있다는 순전한 안도감이 어느 정도 생긴다. 우리는 우리가 존경할 만하거나 정신이 온전하거나 안정적이지 않으며, '정상'이거나 사회가 생각하는 그런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고백할 수 있게 된다. 유치하고, 공상적이고, 거칠고, 희망에 들뜨고, 냉소적이고, 허약하고, 다중적일 수 있게 된다. 우리의 연인은 이 모든 것을 이해하고 눈 감아줄 수 있다.   ----- 1부 낭만주의, 사랑에 빠지다, p37
라비는 사랑의 이름으로 기꺼이 파멸도 하겠다는 자신의 태도를 헌신의 증거로 간주한다. 실용적인 의미에서 결혼이 '불필요하다'는 것은 오히려 결혼에 더욱 감정적인 설득력을 부여할 뿐이다. <중략> 라비에게 결혼은 완벽한 친밀함에 이르려는 대담한 행로의 정점에 있다. <중략> 그가 청혼한 것은 그와 커스틴이 서로에게 느끼고 있는 감정을 보존하고 '동결'시키길 원해서다. 그는 결혼이라는 행위를 통해 황홀한 기분이 영원해지길 기대한다.   ----- 1부 낭만주의, 청혼, p58

   연애 시기에는 뭐가 그리도 할 말들이 많은지. 사소한 버릇부터 남들에게 말하지 못한 비밀까지 별의별 이야기들을 풀어내느라 모두들 전화기를 붙들고 수많은 밤을 지새우곤 했을 것이다. 그리고는 내 사랑하는 이의 그 아픔과 약점을 감싸줄 사람은 나 밖에 없다는 생각으로 결혼을 결심하게 된다. 이 사람과 함께라면 영원히 지금과 같이 행복할 거라 생각하며. 낭만주의의 절정으로서 결혼에 대해 작가는 아래와 같이 정의한다.

결혼 : 자신이 누구인지 또는 상대방이 누구인지를 아직 모르는 두 사람이 상상할 수 없고 조사하기를 애써 생략해버린 미래에 자신을 결박하고서 기대에 부풀어 벌이는 관대하고 무한히 친절한 도박   ----- 1부 낭만주의, 청혼, p65


   그러나 이야기의 시작은 여기서부터 이다. '그 후로 오래오래 행복하게 잘 살았습니다'가 감추어버린 그 이면의 이야기들, 나도 결혼을 시작하고서 알게 된 이야기들 말이다.

그들은 각자 이렇게 의심한다. 만약 상대방이 항상 이렇게 되는 대로이거나, 정반대로 항상 이렇게 엄격하다면 뭔가--세상, 본인, 배우자--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겠는가? 하지만 긴장을 일으킬 때마다 그 긴장감을 더욱 팽팽하게 하는 진짜 의문은 이것이다. "이걸 어떻게 평생 견디고 살지?"   ----- 2부 그 후로 오래오래,  별 것 아닌 일들, p76
모든 집안 문제가 동등한 권위를 갖진 않는다. 상대방이 시리얼을 먹을 때 얼마나 소리를 내는지나, 발행일이 지난 잡지를 얼마나 오래 보관하고 싶어 하는지에 신경을 곤두세운다면 즉시 바보처럼 보일지 모른다. 식기 세척기에 그릇을 어떻게 포개 넣어야 하는지나, 버터를 사용한 뒤 몇 분 안에 냉장고에 넣어야 하는지에 대해 엄격한 규칙을 고수하는 사람은 무안을 당하기 십상이다. 우리를 괴롭히는 갈등이 대단하지 않을 때, 우리는 그 고민에 하찮고 별나다는 꼬리표를 붙이고 싶어 하는 사람에게 휘둘리게 된다. 결국 좌절하는 동시에 우리의 좌절이 존중받을 가치가 있는지 마저도 의심하게 되어 우리를 미덥지 않아하거나 인내심이 부족한 청중에게 문제를 차분하게 설명할 자신감을 잃고 만다.  ----- 2부 그 후로 오래오래,  별 것 아닌 일들, p77~78

   결혼은 일상이다. 일상의 하나하나가 부딪치기 시작한다. 더욱이 어려운 것은 각자가 생각하는 방식, 생활하는 방식이 다르다는 것이다. 나는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들이 상대방에 의해 사소한 것들로 격하될 때는 정말 내가 화를 내는 것이 맞는지조차 헷갈릴 때가 종종 있다. 나는 정말 참을 없이 화가 났는데 한순간 쪼잔한 사람으로 만들어버릴 때는 별의별 생각들이 다 든다. 그러다가 나중에는 내가 무엇 때문에 화가 났는지를 잊어버리는 수준에 이른다. 그럴 때마다 드는 생각이 바로 '이걸 어떻게 평생 견디고 살지?'이다. 알랭 드 보통은 이런 일상의 사소함을 하나하나 건져내어 철학으로 만드는데 탁월한 재능이 있다.


그러나 견딜 만한 관계란 무엇인가에 대한 현실감각은 사회와 예술의 침묵에 약해지고 마는 경우가 너무나 허다하다. 그래서 우리는 다른 커플들에 비해 우리 커플이 훨씬 나쁜 일들을 겪는다고 상상한다. 불행할 뿐 아니라 우리의 불행이 대단히 드물고 기형적인 형태의 것이라 착각한다. 그리고 결국에는 우리의 싸움들이 기본적으로 전혀 차질 없이 진행되고 있는 결혼 생활의 증거라기보다는, 우리가 뭔가 드물고 근본적인 실수를 범한 징표라고 믿게 된다.  ----- 2부 그 후로 오래오래,  별 것 아닌 일들, p83

   그런데 우리는 그런 결혼생활에 대해 적나라하게 들어 본 적이 없다. 우리를 둘러싼 사회와 많은 예술 작품 속에서 보고 들은 결혼은 핑크빛으로 물든 해피엔딩이었다. 그러므로 나의 이런 결혼 생활은 뭔가 잘못되어도 완전히 잘못된 것이라는 생각에 더 불행해진다. 그런데 작가는 말한다. 이런 싸움들이 전혀 차질 없이 진행되고 있는 결혼 생활의 증거라고.

   나와 함께 결혼 생활을 이어나가고 있는 상대방은 내가 결혼을 결심했던 그 완벽한 대상이 아니다. 자신이 말을 안 하더라도 상대방이 나의 토라짐의 이유를 정확히 헤아려주어야 한다고 믿는 어린아이이고, 어릴 때부터 간직하고 있던 무의식적인 논리(설명하지도 못하는 의미)에 따라 행동하는 불완전한 사람일 뿐이다. 우리는 그 실체를 결혼을 하고 나서야 알게 되는 것이다.

좋은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끊임없이 이성적일 필요는 없다. 우리가 익혀두어야 할 것은 우리가 한두 가지 면에서 다소 제정신이 아니라는 것을 쾌히 인정할 줄 아는 간헐적인 능력이다.  ----- 2부 그 후로 오래오래,  감정전이, p116


지난 수년간 그가 눈길에서 미끄러지고, 열쇠를 잃어버리고, 글래스고로 가던 기차가 고장 나고, 과속으로 딱지를 끊고, 새 셔츠 라벨이 간질거리고, 세탁기의 배수가 원활치 않고, 그가 하는 건축 일이 꿈꾸던 수준에 미치지 못하고, 옆집에 새로 이사 온 사람들이 늦은 시간에 음악을 시끄럽게 연주하고, 둘이 이제는 좀처럼 재미를 못 느끼는 건 그녀의 '잘못'이다. 강조해야 할 점은 같은 범주에서 커스틴의 목록도 더 짧거나 더 합리적이지 않다는 것이다. 그녀가 어머니를 자주 보지 못하고, 팬티스타킹의 올이 풀리고, 친구인 지나가 한 번도 연락을 안 하고, 항상 피곤하고, 손톱깎이가 사라지고, 둘이 이제는 좀처럼 재미를 못 느끼는 것 등등 모두가 라비 때문이다.  ----- 2부 그 후로 오래오래,  모든 게 네 탓, p122~123

   밑줄을 치며 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던 부분. 딱 내 얘기다. 요즘에는 모든 게 다 신랑 탓이다. 내 주위에 있는 모든 문제들의 원인이 다 신랑 때문인 것 같다.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그 생각이 얼마나 비이성적인 생각인 줄 안다. 그리고 그것 때문에 신랑에게 화풀이를 해서는 안 된다는 것도 뻔히 안다. 그리고 반성한다. 왜 나는 내가 가장 소중하게 생각해야 할 사람에게 이런 말도 안 되는 대접을 하는지에 대해서. 그렇지만 한 순간이다. 또 화가 불쑥불쑥 치밀어 오르기 때문에.....^^


그 사람을 탓하는 건 당연히 부조리 중에서도 부조리다. 하지만 이렇게만 본다면 사랑의 작동 법칙을 잘못 이해한 셈이다. 우리는 정말로 책임이 있는 권력자에게 소리를 내지를 수가 없기에 우리가 비난을 해도 가장 너그럽게 보아주리라 확신하는 사람에게 화를 낸다. 주변에 있는 가장 다정하고, 가장 동정어리고, 가장 충성스러운 사람, 즉 우리를 해칠 가능성이 가장 적으면서도 우리가 마구 소리를 치는 동안에도 우리 곁에 머물 가능성이 가장 큰 사람에게 불만을 쏟아놓는 것이다.  ----- 2부 그 후로 오래오래,  모든 게 네 탓, p123
우리가 파트너에게 부당한 요구들을 하고 그 곁에서 매우 부조리해지는 까닭은 우리 내면의 불명료한 부분을 이해하고 곁에 있는 것만으로도 우리의 고통을 많이 해소시켜주는 누군가가 또한 우리 삶의 모든 것들을 어떻게든 바로잡을 수 있으리라 믿기 때문이다. 부모의 기적 같은 능력을 보고 감탄했던 어린아이가 수십 년 뒤 어른이 되어 그때의 경외감에 별난 경의를 표하듯 상대방의 능력을 과장하는 것이다.  ----- 2부 그 후로 오래오래, 모든 게 네 탓, p126~127

   대학교 1학년 때 과 선배로 만난 신랑에게 나는 아직까지 경외감에 사로잡혀 있는지도 모르겠다. 너무나 믿음직스럽고 존경스러웠던 모습에 내 삶의 모든 문제들을 바로잡아 주리라는 믿음을 굳건히 가지고 있는 것인가 보다. 그런데 이 하늘 같은 선배가 결혼하더니 내 일, 네 일 철저히 따지는 계산적인 쪼잔한 사내가 되어버리더란 말이다.^^

   곰곰 생각해보면 내가 우리 신랑에게 가지고 있는 감정은 양가적이다. 처음 만나고 사랑에 빠졌을 때 느낀 존경심(?), 교직생활을 함께 시작하면서 느낀 경쟁의식. 이 두 감정이 교묘하게 섞여 있다. 어려운 일이 있을 때는 하늘 같았던 선배가 해결해 주겠지 하고 있다가 그렇지 못하면 내가 뭐 이따위 결혼을 했나 싶다. 그리고 한 편으로는 함께 시험에 붙어 똑같이 교직생활을 시작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애들을 낳고 키울 때 어쩔 수 없이 집에 발목 잡혀 제자리걸음이었는데, 신랑은 자기계발을 위해 여기저기 참여하며 발을 넓혀 발전한 모습을 보면 그렇게 얄미울 수 없다. 그래서 모든 게 네 탓이 되나 보다.


진심으로 누군가를 사랑한다면 그 또는 그녀가 변화하기 바란다는 말은 꺼낼 수 없다. 낭만주의는 이 점을 분명히 한다. 진실한 사랑은 파트너의 존재를 온전히 수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자애롭고자 하는 이러한 근본적인 헌신이 있기에 사랑의 처음 몇 달은 무척이나 감동적이다. 갓 시작한 관계 안에서 우리의 취약성은 관대하게 다뤄진다. 수줍음, 서투름, 혼란은 빈정거림이나 불평을 낳기보다는(우리가 어렸을 때 그랬듯이) 애정을 불러일으키고, 우리의 까다로운 면들도 오로지 측은지심이란 필터를 통해 해석된다.
이런 순간들로부터 아름답지만 험난하고, 무모하기까지 한 신념이 발생한다. 제대로 사랑받으면 반드시 나의 모든 면을 승인받게 되어 있다고 말이다.  ----- 2부 그 후로 오래오래,  가르치기와 배우기, p131~132

   난 내가 매우 현실주의적이라고 생각했는데 아닌가 보다. 마지막 한 문장, '제대로 사랑받으면 반드시 나의 모든 면을 승인받게 되어 있다고 말이다' 여기서 무너졌다. 아직까지도 내 결혼이 힘든 것이 바로 이것 때문인가 보다. '나의 이런 면도 받아주지 못하면서 어떻게 사랑한다고 말을 하나?' 싶은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연애 초기에나 가능한 감정을 결혼한 지 17년이 지나도록 붙들고 있었으니......


아이들은 가장 순수한 형태의 사랑은 봉사라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친다. <중략> 아이들은 그저 도움이 절실히 필요하기 때문에--그리고 우리가 그들을 도와줄 위치에 있기 때문에-- 어떤 보답도 기대하지 않고 베푸는 법을 우리에게 가르친다.   ----- 3부 아이들, 사랑의 가르침, p147
사랑을 듬뿍 받은 아이란 쉽지 않은 선례다. 본질상 부모의 사랑은 그 사랑을 베풀기 위해 쏟은 노력을 감추는 작용을 한다. 부모의 사랑은 받는 사람에게 베푸는 사람의 복잡한 사정과 슬픔을 감추고, 부모가 사랑의 이름으로 다른 이익, 친구, 관심사를 얼마나 희생했는지를 드러내지 않는다. 부모의 사랑은 무한한 너그러움으로 이 작은 존재를 한동안 우주의 중심에 놓는다.  ----- 3부 아이들, 사랑의 가르침, p155

   아이를 가지면서 결혼 생활은 더욱더 힘들어지게 마련이다. 신경 쓰고 받아줘야 할 대상이 상대방 한 명뿐일 때는 그래도 상대를 이해하는 폭이 넓을 수 있었지만 아이라는 대상이 생기면서 우리의 모든 신경은 아이에게 향한다. 한 생명이 태어나면서부터 어른들의 말에 심히 공감을 했더랬다. '아이를 낳아봐야 어른이 된다'라는 말과 '그래도 배속에 있었을 때가 가장 편하다'는 말이 그것이다. 정말 아이는 아주 심각하게 연약한 존재였다. 아무것도 할 줄 모르는 작은 인간의 생명이 내 손에 달려 있다는 그 무거운 책임감과 부담감은 느껴보지 않고서는 상상할 수조차 없다. 모든 의식주가 아이에게 맞춰지면서 나 자신조차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시간이 잠시도 없을진대 상대방에게 인간으로서의 배려를 베풀기란, 생각할 수 조차 없다. 아니 내가 이렇게 인간답지 못하게 된 게 다 저 사람 때문(그렇지 않음에도 불구하고)이다. 그런데 저 사람은 여전히 출근을 하고 일상생활을 영위해 나가는데 나의 일상생활은 다 사라지고 입 한 번 열어보지도 않은 채 아이만 보살펴야 한다. 아이가 방실방실 웃을 땐 세상 다 행복하다가도 뒤돌아 앉으면 뭐 이런 말도 안 되는 상황이 다 있나 싶었다. 그래서 한동안 심각하게 고민했었다. 나는 모성애가 한참 부족한 여자인가 싶어서......  '사랑을 위한 노력이 그들을 녹초로 만든다'는 작가의 말대로 결혼이라는 일상생활을 영위해 나가기 위한 노력이 우리는 녹초로 만드는 게 현실인 것이다.

베이비 그로를 입은 아기가 편안해하고 침실 아기 모니터 안의 모든 것이 조용할 때, 무한히 참을성 있고 친절한 두 보호자는 그들의 구역으로 돌아와 텔레비전과 읽다 만 일요 잡지에 손을 뻗고, 만약 아기가 기적적으로 그들의 상호작용을 관찰하거나 이해하게 된다면 적잖이 충격에 빠질 행동양식으로 즉시 돌아온다. 라비와 커스틴은 아이를 돌보며 오랜 시간 동안 사용한 부드럽고 관대한 언어 대신 종종 모질고 격하고 짜증 섞인 언어를 쓴다. 사랑을 위한 노력이 그들을 녹초로 만든다. 그들에겐 서로에게 줄 것이 전혀 남아 있지 않다. 그들 각자의 내면에 있는 피곤한 아이는 오랫동안 방치된 것에 화가 치밀고 조각나 있다.  ----- 3부 아이들, 사랑의 가르침, p156


좋은 부모의 역할에는 중요하면서도 무척 까다로운 요건이 딸려 있다. 대단히 유감스러운 소식을 끊임없이 전해야 한다는 것이다. <중략> 아이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부모는 양치질, 숙제, 방 정돈, 취침 시간, 마음 넓게 쓰기, 컴퓨터 사용 제한에 대해 말할 각오가 되어 있어야 한다. 아이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부모는 재미가 정말 시작되려는데 삶의 달갑지 않은 면들을 들이미는 싫고 짜증 나는 습관을 가진 따분한 배역도 마다하지 않아야 한다. 그리고 이렇듯 사랑을 드러내지 않게 실행한 결과로, 좋은 부모는 그 실행이 잘된 경우에 강렬한 분노와 적개심의 표적이 되고 만다.  ----- 3부 아이들, 사랑의 한계, p167~168
가끔 부모의 감상 벽이라는 장막이 벗겨지면 라비는 만일 자신의 아이들이 아니라면 거의 확실히 그에게 아무 특별한 인상을 주지 못했을--너무 특별할 것이 없어 사실상 30년 뒤 술집에서 만난다면 대화를 나눌 생각조차 하지 않을지 모르는-- 두 사람에게 그가 인생의 황금기 중 상당한 시간을 바쳐왔다는 것을 보게 된다. 참으로 견디기 어려운 통찰이다.  ----- 3부 아이들, 사랑의 한계, p172

   그런데 이러한 부모의 역할을 잘 실행하면 할수록 아이들에겐 나쁜 부모가 된다니...... 또 그렇게 나쁜 배역까지 마다하지 않고 온 정성을 다해 부모의 역할을 실행한 대상이 그리 특별하지 않은 아이라는 것. 뛰어날 것 하나 없는 아주 평범한 아이를 위해 자신 인생의 황금기를 다 바치고 나서도 칭찬은커녕 분노의 대상이 되는 것이 바로 부모라는 삶의 통찰을 보여주는 부분이다. 다시 한번 느끼지만 알랭 드 보통은 누구든지 겪을 수 있는 일상의 평이한 상황을 날카로운 통찰력으로 짚어내어 다시 한번 생각하게 만드는 재주를 가진 작가다.


현대사회는 부부가 모든 면에서 평등하기를 기대한다지만, 실제로는 고통의 평등을 기대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괴로움의 복용량을 확실히 똑같게 측량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불행은 주관적인 경험으로, 각 당사자가 실제로는 자신의 삶이 더 저주받았으며 파트너는 이를 인정하고 속죄하지도 않는다는 진지하면서도 경쟁적인 확산에 빠질 유혹이 상존한다. 자신이 더 힘들게 살고 있다는 자기 위안식의 결론을 피하려면 초인적인 지혜가 필요하다.   ----- 3부 아이들, 빨래의 위신, p194~195

   별표 딱! 주고 싶었던 문장 '현대사회는 부부가 모든 면에서 평등하기를 기대한다지만, 실제로는 고통의 평등을 기대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게 사랑해서 상대방의 결점까지도 감싸 안고 싶어 결혼을 했건만, 결혼의 현실은 다른 모든 것을 떠나 가장 중요한 것이 그 사랑하는 상대와 고통을 평등하게 나눠갖는 것이라는 사실. 결혼하기 전에는 미처 몰랐다. 정말 그렇다. 다른 것은 중요하지 않다. 내가 힘든 만큼 너도 힘들어야 한다. 이게 진리다.^^ 그런데 이 고통이라는 게 주관적인 느낌이라 정확히 측량할 수 없으니 문제다. 그래서 저자는 '초인적인 지혜'가 필요하단다.^^ 초인적인 지혜!


   라비는 출장에서 만난 여자와 하룻밤의 외도를 하게 된다. 하지만 라비는 안다. 그녀와의 사랑도 언젠가는 현실이 될 것이라는 걸. 그래서 친절을 베풀기로 한다. '좋아하는 어떤 사람에게 베풀 수 있는 최고의 친절은 신속히 그 길을 빠져나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옛날에 보았던 '사랑한다면 이들처럼'이라는 프랑스 영화가 생각나는 부분이다. 당신이 나에게 질려할 것이 두려워 사랑의 절정에서 떠난다는 유서를 남기고 자살한 여주인공은 결혼의 현실을 아주 잘 알았던 것이었다.

결혼 : 자신이 사랑한다고 주장하는 사람에게 가하는 대단히 기이하고 궁극적으로 불친절한 행위   ----- 4부 외도, 양립할 수 없는 욕망들, p212~213


우리만 선발된 게 아니다. 그 누구와, 심지어 천생의 배필과 결혼을 해도 자신을 기꺼이 희생시켜 얻은 다양한 고통을 확인하게 된다.   ----- 4부 외도, 양립할 수 없는 욕망들, p239
외도의 여파로 라비는 결혼 생활의 목적을 다르게 보게 된다. 젊었을 때 그는 결혼 생활을 감정(애정, 욕구, 열정, 갈망 등)에 대한 축성(祝聖)으로 여겼다. 그러나 이제는 그 못지않게 하나의 제도로서도 중요하게 인식한다. 관계자들의 감정에 잠깐씩 일어나는 그 모든 변화에 낱낱이 주목하지 않고 한 해 한 해 굳건히 버틸 수 있도록 해주기 위해 존재하는 제도로서 말이다. 결혼 생활의 정당성은 감정보다 더 견고하고 지속적인 현상들, 즉 나중에 수정 불가한 최초의 약속 행위, 그리고 무엇보다 자신들을 창조한 사람들의 일상적인 만족에 대한 무관심을 타고난 자식들이라는 존재에 있다.   ----- 4부 외도, 비밀, p242

   결국 결혼이라는 것은 아무리 알맞은 짝을 만난다 할 지라도 고통일 수밖에 없다. 그런데도 왜 결혼은 유지되고 있는 것일까? 라비는 어떤 짝을 만난다 할지라고 흔들릴 수밖에 없는 현실을 묶어두기 위한 제도로서 결혼을 인식하게 된다. 마냥 흔들리는 감정을 믿기보다는 서로의 약속, 사랑의 결과물인 아이들로 서로를 견고히 묶는 존재로. 결혼이라는 것은 사랑의 완성돤 형태라기보다는 사회적으로 구성원을 결속시키기 위한 하나의 사회제도인 것이다.


라비는 자신이 단 한 번 결혼했다는 입장을 고수할 수 있는 것은 순전히 언어의 교묘함 덕분이라는 점을 알아본다. 겉으로는 편리하게도 단일한 관계처럼 보이지만 그 밑에 수많은 진전, 단절, 재협상, 소원한 기간, 감정적 회귀가 깔려 있어 사실상 그는 적어도 열두 번은 이혼과 재혼을 겪어 온 셈이다. 오직 한 사람과 말이다.  ----- 5부 낭만주의를 넘어서, 결혼할 준비가 되다, p277

   열두 번의 이혼과 재혼을 심정적으로 겪고 나서야 라비는 비로소 결혼할 준비가 되었다고 느낀다. '나를 완벽히 이해하는 영혼의 짝인 그 사람만을 영원히 사랑할 것이라는 확신' 같은 낭만주의를 넘어서게 된 것이다. 그 가장 기본이 바로 '완벽함'의 포기이다.

옛날에는 사람이 재정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어떤 이정표에 도달하면 결혼할 준비가 되었다고 보았다. 그의 이름이 붙은 집, 리넨으로 가득 채운 혼수, 벽난로 위에 진열된 자격증, 또는 소 몇 마리와 얼마만큼의 땅을 소유하는 것이 그런 예였다.
그런 뒤 낭만주의 사상의 영향으로 이런 실질적인 측면이 지나치게 금전을 따지고 계산을 하는 것으로 여겨졌고, 초점이 감정적 특질로 이동했다. 올바른 감정들, 그중에서도 특히 영혼의 짝을 만났다는 믿음, 상대방이 나를 완벽히 이해한다는 느낌, 다시는 상대 말고는 다른 누구와도 잠자리를 하고 싶지 않다는 확신이 중요하다고 여겨진 것이다.  
이제 라비는 낭만주의 개념들이 재난을 낳는다는 것을 안다. 그의 준비된 마음은 완전히 다른 기준들에 기초한 결과다. 그가 결혼할 준비가 된 것은 무엇보다 완벽함을 포기했기 때문이다.   ----- 5부 낭만주의를 넘어서, 결혼할 준비가 되다, p278


연인이 '완벽하다'는 선언은 우리가 그들을 이해하지 못했다는 징표에 불과할 수 있다. 어떤 사람이 우리를 상당히 실망시켰을 때 그 순간 우리는 그 사람을 알기 시작했다고 주장할 수 있다. <중략>
따라서 결혼할 사람을 선택하기란 감정의 존재 법칙을 우회할 방법을 찾았다고 믿는 일이 아니라 어떤 종류의 고통을 흔쾌히 견딜지 결정하는 일이다. 아니면 우리는 모두 당연히 악몽의 전형인 '엉뚱한 사람'을 곁에 두게 된다.
그러나 이것이 재앙일 이유는 없다. 진보한 낭만적 비관주의는 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모든 것일 수는 없다고 가정한다. 우리는 또 다른 타락한 생명체와 함께 사는 현실에 나 자신을 적응시키 최대한 부드럽고 친절한 방법을 찾아야 한다. 결혼은 '어지간히 좋은' 결혼만 있을 수 있다.   ----- 5부 낭만주의를 넘어서, 결혼할 준비가 되다, p279

   사람에 대한 이해는 그 사람이 불완전한 존재라는 것을 인정할 때 가능한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당연히 우리가 알고 있던 사람과는 전혀 다른 '엉뚱한 사람'과 결혼 생활을 시작할 수밖에 없다. 우리가 결혼을 결심할 때의 그 사람은 완벽한 사람이므로. 그러나 모든 사람은 조금씩 잘못되어 있는 게 당연한 것이므로 내 파트너도 완벽하지 않다는 것을 받아들이고 적응하는 것. 낭만주의에서는 이런 결혼을 잘못된 것으로 인식할 수밖에 없지만 낭만적 비관주의에서는 당연한 일일 뿐이다. 결혼은 '어지간히 좋은' 결혼만 있는 거니까.

   이 외에도 라비가 비로소 결혼할 준비가 되었다고 느끼는 점들이 하나 같이 결혼에 대한 중요한 조언들이다. 그중 내가 더 공감했던 부분들이다.


라비가 결혼할 준비가 되었다고 느끼는 것은 타인에게 완전히 이해되기를 단념했기 때문이다.
사랑은 아주 든든하고 특별한 방식으로 자신이 이해되고 있다는 경험에서 시작된다. <중략> 이 상황이 영원히 계속되진 않는다. 연인의 이해능력에는 적정 한계가 있고, 우리는 언젠가 그 한계에 부딪힌다 하더라도 직무유기라 비난하지 말아야 한다. 그들은 애석하게도 무능했던 것이 아니다. 그들은 우리가 어떤 사람인지 충분히 헤아릴 수 없으며, 우리도 마찬가지다. 그게 정상이다. 어떤 사람도 다른 누군가를 정확히 이해하고 충분히 공감하지 못한다.   ----- 5부 낭만주의를 넘어서, 결혼할 준비가 되다, p280
라비가 결혼할 준비가 되었다고 느끼는 것은 자신이 미쳤음을 자각하기 때문이다. 
자신이 미쳤다는 생각은 철저히 직관에 반한다. 우리는 자신이 지극히 정상이고 대체로 선량하다고 생각한다. 발을 못 맞추는 건 나머지 사람들이라고...... 그렇지만 성숙은 자신의 광기를 감지하고, 적절한 때에 변명하지 않고 인정하는 능력에서 시작된다. 만일 수시로 자신이란 사람에 대해 당황스러워지지 않는다면 자기 이해를 향한 여정은 시작되지도 않은 것이다.   ----- 5부 낭만주의를 넘어서, 결혼할 준비가 되다, p280~281
라비가 결혼할 준비가 되었다고 느끼는 것은 커스틴이 까다로운 게 아님을 이해했기 때문이다.
결혼이라는 새장 안에서 집안 살림, 친인척, 청소 분담, 파티, 식료품 같은 사소한 일로 화를 내며 당연히 '까다롭게' 보인다. 하지만 그건 상대방의 허물이 아니며, 우리가 함께 만들어가려는 삶의 속성일 뿐이다. 대개 난감한 것은 결혼이란 제도이지, 관련된 개인들이 아니다.   ----- 5부 낭만주의를 넘어서, 결혼할 준비가 되다, p281
라비와 커스틴이 결혼할 준비가 된 것은 그들이 서로 잘 맞지 않는다고 가슴 깊이 인식하기 때문이다.
낭만주의 결혼관은 '알맞은' 사람을 찾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이는 우리의 허다한 관심사와 가치관에 공감하는 사람을 찾는 것으로 인식된다. 장기적으로 그럴 수 있는 사람은 어디에도 없다. 우리는 너무 다양하고 특이하다. 영구적인 조화는 불가능하다. 우리에게 가장 적합한 파트너는 우연히 기적처럼 모든 취향이 같은 사람이 아니라, 지혜롭고 흔쾌하게 취향의 차이를 놓고 협의할 수 있는 사람이다.   ----- 5부 낭만주의를 넘어서, 결혼할 준비가 되다, p283

   어떤 사람도 다른 누군가를 정확히 이해하고 공감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상대방이 나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정상이다. 그들이 무능한 게 아니라 당연한 것이다. 게다가 나란 존재는 수시로 미칠 수 있는 존재이므로. 또한 상대방이 까다롭게 구는 것은 상대방 자체의 문제가 아니라 결혼이라는 삶 자체의 문제인 것이다. 삶이란 까다로울 수밖에 없으므로. 그러므로 우리에게 가장 알맞은 파트너는 모든 것이 잘 맞는 사람이 아니라 잘 맞지 않음을 이해하고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이다. 결혼에 대한 이처럼 현실적인 조언이 있을까 싶다.

라비가 결혼할 준비가 되었다고 느끼는 것은 대부분의 러브스토리에 신물이 났기 때문이고, 영화와 소설에 묘사된 사랑이 그가 삶의 경험을 통해 알게 된 사랑과는 거의 일치하지 않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러브스토리를 기준으로 본다면 우리 자신의 실제 관계는 거의 다 하자가 있고 불만족스럽다. 많은 경우 별거와 이혼이 불가피해 보이는 것도 놀랍지 않다. 그러나 우리를 자주 잘못 인도하는 미적 매체들이 부과한 기대에 따라 우리의 관계를 판단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잘못은 삶의 아닌 예술에 있다. 불화를 일으키기보다는 우리 자신에게 보다 정확한 이야기들을 들려줄 필요가 있다. 시작에만 너무 얽매여 있지 않은 이야기, 완벽한 이해를 약속하지 않는 이야기, 우리의 문제를 정상적인 것으로 되돌려놓고 사랑의 여정에서 거쳐 갈 길이 우울하더라도 희망적임을 보여주는 이야기를.   ----- 5부 낭만주의를 넘어서, 결혼할 준비가 되다, p284

     

불확실성을 의식하는 만큼 라비는 더욱 열렬히 이 햇살을 붙잡아두고 싶다. 비록 잠깐 동안이지만 모든 것이 명료하다. 그는 커스틴을 사랑하고, 그 자신을 충분히 신뢰하고, 아이들을 어여삐 여기고 인내하는 법을 알았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이 절망스러울 정도로 허약하다. 그는 자신을 행복한 사람이라 부를 권리가 없음을 잘 알고 있다. 단지 잠깐 동안 만족을 누리고 있는 평범한 인간일 뿐.
그는 이제 거의 어떤 것도 완벽해질 수 없다는 것을 안다. 그처럼 완전히 평범한 인생을 사는 데에도 용기가 필요하다는 것을. <중략> 불안에 굴복하지 않을 용기, 좌절하여 남들을 다치게 하지 않을 용기, 세상이 부주의하게 입힌 상처를 감지하더라도 너무 분노하지 않을 용기, 미치지 않고 어떻게든 적당히 인내하며 결혼 생활의 어려움들을 극복할 용기, 이것은 진정한 용기이고, 그 무엇보다 더욱 영웅적인 행위이다.  ----- 5부 낭만주의를 넘어서, 미래, p292~293

   우리가 행복이라고 부르는 것도 완전한 것일 수 없다. 행복은 그냥 순간의 감정일 뿐이다. 행복을 느끼는 바로 그 순간. 결국 결혼의 일상은 나를 포함하여 나의 파트너, 파트너와 나와의 관계가 모두 불완전함을 받아들이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에 적응하여 살아갈 용기를 가질 때 유지되는 것이다.

   작가가 라비와 커스틴의 결혼생활을 통해 하고자 했던 이야기는 결혼이라는 삶의 불완전함을 인식하고 받아들이라는 내용인 것 같다. 사랑의 완전한 형태로서의 결혼이라는 것은 드라마나 동화에서나 볼 수 있는 잘못된 이야기일 뿐이며 그 어떤 결혼도 결코 완벽할 수 없다는 것 말이다. 우리가 결혼이나 삶이 불완전하다는 것을 받아들이면 그 찰나에 지나가는 만족감과 행복감을 오롯이 붙잡으려 노력하지 않을까? 그런 노력들이 지속되고 많아질수록 우리의 불완전한 결혼도 조금은 좋은 결혼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책을 읽으면서 많은 생각들을 하게 됐다. 무엇보다 나의 결혼에 대해, 내가 결혼에 대해 생각하는 방식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해 준 기회가 되었다. 결혼생활에 신물이 난 사람들에게 특히 결혼생활을 앞두고 있는 사람들에게 꼭 권하고 싶은 책이다. 지금 막 결혼을 결심한 사랑이 송송 샘솟는 사람들에겐 뭐 별로 와 닿지는 않을 것 같기 하지만 말이다.



이상적인 세계에서는 혼인 서약은 완전히 새롭게 쓰일 것이다. 제단에 서서 부부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우리는 앞으로 몇 년 후에 오늘 우리가 하고 있는 이 행위가 우리 인생에서 최악의 결정인 것처럼 보일지라도 공황에 빠지지 않겠습니다. 또한 우리는 더 나은 선택이 있을 수 없다는 점을 인정하기에 다른 곳으로 눈을 돌리지 않을 것도 약속합니다. 모든 인간은 언제나 구제불능, 우리는 정신이 나간 종(種)입니다."  ----- 4부 외도, 양립할 수 없는 욕망들, p2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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