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망각의 서고

평범한 아빠의 정체는 놀라운 비밀의 문을 여는데...

by SeaWolf

1.

낡은 트렌치코트는 아버지의 풍경화였다. 시간의 닳은 자국들이 겹겹이 쌓여, 아버지의 침묵을 닮은 무거운 색을 냈다. 코트 안쪽 주머니에서 희미하게 스며 나오는 잉크 냄새와 겨울 서리 같은 냉기. 그 차가움에 미대 휴학생 한결은 아버지가 단순한 사서가 아님을 오래전부터 직감했다. 아버지는 책 속에 잠겨 세상과의 소통을 최소화했고, 한결은 그의 침묵을 이해하려 애썼지만 번번이 실패했다. ‘책벌레’, ‘고독한 사서’. 그 이상의 정의는 찾기 어려웠다.

하지만 오늘 아침, 아버지의 서재에서 발견한 낡은 ‘업무일지’는 그의 모든 관점을 흔들었다.

기묘한 상징과 그림들 사이로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단어는 ‘공백’이었다. 그리고 그 옆에 붉은 잉크로 휘갈겨 쓴 이름, ‘카론’. 일지의 마지막 장에는 이런 문장이 적혀 있었다. “사건번호 734, ‘영원한 겨울의 왕국’ 편, 카론의 공백 침식 확인. 서사 붕괴율 13%→4%로 안정화. 존재력 소모 극심.”

일지 밑에는 빛바랜 사진 한 장이 끼워져 있었다. 젊은 시절의 아버지가 지금과 달리 환하게 웃고 있었다. 눈빛에는 생기가 넘쳤고, 트렌치코트 너머에서도 열정이 느껴졌다. 사진 뒷면에는 ‘시간을 삼킨 자들’이라는 문구와 함께 물음이 적혀 있었다. ‘그들은 치유인가, 혹은 증상인가?’

그때, 도서관 전체에 미묘한 떨림이 느껴졌다. 형광등이 깜빡거리고, 책장에서는 이상한 신음 소리가 들려왔다. 마침내 도서관 중앙 홀에 기묘한 ‘노이즈’가 발생했다. 현실과 디지털 세계가 뒤섞인 글리치 현상이었다. 사람들은 비명을 질렀고, 스마트폰 화면은 깨진 거울처럼 현실을 비정상적으로 비췄다.

한결은 본능적으로 아버지의 트렌치코트를 움켜쥐었다. 손끝에서 희미한 푸른빛이 번져 나왔다. 그는 이제 알았다. 아버지는 시간과 이야기를 지키는 마지막 보루였다. 그리고 이제 그 역할은 자신에게 넘어오려 하고 있었다. 노이즈 속에서 어렴풋이 아버지의 젊은 시절 모습이 나타났다. 그는 사진 속 모습처럼 환하게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마치 오랜 친구를 만난 듯, 반갑다는 표정이었다.

‘시간을 삼킨 자들’. 그들은 과거를 완전히 삼키는 것이 아니라, 시간을 먹고 기억을 얻어 살아가는 존재들. 한결은 깨달았다. 아버지는 그들과 교류하며 시간을 지켜온 것이었다. 트렌치코트의 서리는 잊힌 시간의 흔적이었고, 잉크는 기억을 담는 매개체였다.


2.

도서관의 진동이 멎자 세상은 빛바랜 초상처럼 색을 잃었다. 도서관 안은 정적이었지만, 침묵이 아니라 끊임없이 속삭이는 합주였다. 책들은 살아있는 심장처럼 미세하게 뛰었고, 그 고동은 한결의 불안을 증폭시켰다.

어깨에 살짝 무언가가 내려앉았다. 검은 잉크가 살아 움직이는 듯한 형상의 고양이, ‘먹’이 능글맞게 웃으며 말했다.
“걱정 마, 한결. 세상은 아직 완전히 망가지진 않았어. 조금 복잡해졌을 뿐이지.”
먹의 목소리는 오래된 책장의 속삭임 같았지만, 장난기가 넘쳤다. 어릴 적 한결의 낙서에서 태어난 줄 알았던 이 상상 친구는, 이야기의 파편이자 정수인 ‘잉크 스피릿’이었다.
“자네 아버지는 대단한 사람이었지. 이야기들을 사랑했고, 이야기를 통해 세상을 지켰어. 특히 ‘틈새’에 숨겨진 잃어버린 이야기들을 좋아하셨지. 저 책들 하나하나가 누군가의 삶이고, 누군가의 기억이야. 그리고 그 기억들이 모여 세상을 이루는 거고.”

“아버지는… 무슨 이야기를 가장 좋아하셨어요?” 한결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그때, 중앙 데스크에서 윤지혜 사서가 다가왔다. 늘 완벽하게 다려진 블라우스와 차분한 표정. 하지만 오늘은 그 표정 아래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한결 씨. ‘공백’의 침식 반응이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나고 있어요. 아버님께서 막아내신 여파입니다.”
그녀는 해설 대신 상황을 보고했다. 그녀는 ‘도서관’ 세계에 대한 첫 번째 레슨을 시작하러 온 것이었다. 그녀는 손에 들린, 은빛 바탕에 복잡한 문양이 새겨진 카드 한 장을 내밀었다.
“서고 관리자로서 앞으로 자주 마주하게 될 풍경이에요. 이것으로 당신도 이제 ‘이야기’를 다루는 자가 된 겁니다.”

사서증이었다. 단순한 도서 대출 카드가 아니었다. 만지면 따뜻한 기운이 느껴졌다. 사서증에는 한결의 이름과 함께 ‘이야기꾼’이라는 단어가 새겨져 있었다.
‘나는 과연 이야기꾼으로서 세상을 지킬 수 있을까?’
그의 불안감은 디지털 시대의 소외감과 관계의 표면성, 진정성에 대한 갈망 등이 뒤섞인 복잡한 감정이었다.

윤지혜 사서는 완벽해 보였지만, 그녀의 눈동자 속에는 미묘한 슬픔이 어려 있었다. 마치 오래된 사진 속 인물처럼.
“이야기는 단순한 과거의 기록이 아니에요, 한결 씨.” 그녀의 목소리는 부드러웠지만 깊이를 담고 있었다. “이야기는 현재를 해석하고 미래를 만들어가는 힘을 가지고 있죠. 우리가 잊고 있던 이야기들을 다시 떠올릴 때, 세상은 조금씩 변화해요. 당신의 아버지는 그걸 잘 알고 계셨어요.”
그녀는 도서관 구석에 놓인 오래된 책장 하나를 가리켰다.
“잊혀진 왕국의 연대기, 작은 마을의 전설, 이름 없는 예술가의 자화상… 아버지께서는 그 작은 이야기들을 통해 세상의 큰 흐름을 읽으려 하셨어요. 그리고 당신도 이제 그 흐름을 읽어야 합니다.”

그때, 서고 한쪽 벽면에서 거대한 균열이 생겨났다. 검은색 잉크가 번져나가듯 빠르게 퍼져나갔다. 균열 속에서 형체를 알 수 없는 괴물들이 쏟아져 나왔다. 조각난 페이지처럼 불완전한 형체. 어떤 괴물은 끊임없이 스크롤되는 피드처럼 몸이 바뀌었고, 어떤 괴물은 ‘좋아요’를 갈구하는 입을 벌리고 달려들었다. ‘공백’의 잔당들이었다.
“공백의 침식이 심해지고 있어.” 윤지혜가 냉정한 표정으로 괴물들을 바라보았다. “최근 ‘공백’은 단순한 기억의 부재를 넘어선 존재론적 허무로 확장되고 있지. 카론이 주장하던 대로야. 서사 마법의 힘이 약해진 탓이야.”
그녀는 손목에 찬 자신의 사서증을 가볍게 두드렸다. “준비됐나, 한결? 이제 네 차례야.”

3.

한결은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떨리는 손으로 사서증을 높이 들어 올리자, 은은한 빛이 흘러나와 그의 몸을 감쌌다. 언제나 무뚝뚝했던 아버지의 얼굴이 떠올랐다. 아버지는 항상 침묵했지만, 그의 눈빛에는 깊은 사랑과 연민이 담겨 있었다. 그는 이제 아버지의 뒤를 이어, 이야기를 지키는 ‘서고 관리자’가 되어야 했다.

괴물들의 공격이 시작되었다. 그는 아버지에게 배운 대로 서사 마법을 사용했다. 머릿속에 떠오르는 이미지를 현실로 구현하려 했지만, 그의 마법은 아직 미숙했다. 만들어낸 방어막은 곧 깨질 듯 흔들렸다. 괴물들은 그의 불안감을 먹고 더욱 강해졌다.

그때, 그는 깨달았다. 진정한 이야기는 완벽하게 인쇄된 페이지가 아니라 끊임없이 변화하고 재해석되는 살아있는 존재라는 것을. 이야기는 고정된 의미가 아니라, 해석하는 사람에 따라 다르게 빛나는 유기체와 같았다. 그는 아버지에게 배운 대로 자신의 불안과 욕망, 그리고 디지털 시대의 부조리를 담아 새로운 이야기를 창조해야만 했다. 그 이야기가 바로 ‘공백’을 메우는 열쇠가 될 것이었다.

그는 사서증에서 더욱 강렬한 빛을 끌어냈다. 빛은 단순한 방어막이 아니라 날카로운 칼날이 되어 괴물들을 베어냈다. 그가 만들어낸 이미지는 적극적인 공격이었다. 스크롤되는 피드의 혼란스러움을 담아 괴물들을 휘감았고, 좋아요를 갈구하는 입들을 질식시켰다. 그는 이제 더 이상 아버지의 그림자가 아니었다. 자신만의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서고 관리자’로서 당당하게 서 있었다.

전투가 끝나고 서고는 다시 고요에 잠겼다. 하지만 이전과는 달랐다. 괴물들이 사라진 자리에는 희미한 ‘글리치’ 현상이 남아, 책장 그림자가 불안정한 영상처럼 끊임없이 프레임을 바꿔 나갔다. 윤지혜는 능숙하게 서사 마법으로 글리치를 정리했지만, 그녀의 얼굴에는 미묘한 불안감이 스쳐 지나갔다.
“좋아, 한결. 첫 번째 전투치고는 훌륭했어.” 윤지혜는 칭찬했지만, 시험을 보는 듯한 날카로운 눈빛이었다. “하지만 너의 서사 스타일은 아직 불안정해. 너무 감정에 의존하고, 논리가 부족해.”

“감정이 논리보다 중요할 때도 있잖아요.” 한결은 반박했다. “우리가 지키는 건 딱딱한 역사 기록만이 아니니까요. 사람들의 기억이고, 꿈이고, 사랑이고… 그 모든 감정들이 모여 이야기가 되는 거 아니에요?”

윤지혜는 잠시 침묵했다. “감정은 중요하지. 하지만 감정에만 매달리면 이야기는 쉽게 마모돼. 특히 지금처럼 ‘공백’의 침식이 심해지고 있는 상황에서는 더욱 그렇고.”
마모… 아버지 한세진 역시 서사의 마모에 취약하다고 했던가? 그는 이야기 속 인물들의 고통을 너무나 깊이 공감해서, 때로는 자신의 존재마저 희미해질 때가 있다고 했다. 한결은 갑자기 아버지의 낡은 트렌치코트가 떠올랐다. 그 안에는 세상의 슬픔과 기쁨이 모두 담겨있는 듯했다.

“아버지께서는 어떻게 하셨는데요?” 한결이 물었다. “서사의 마모를 어떻게 견디셨어요?”
“그분은… 이야기를 ‘관찰’하는 능력이 뛰어났어. 감정에 휩쓸리기보다는, 이야기의 흐름을 객관적으로 바라보고 핵심을 파악했지.”
‘관찰’… 한결은 자신의 서사 스타일과는 정반대라는 느낌을 받았다. 그는 이야기를 ‘경험’하고 싶어 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그는 점점 더 아버지와 멀어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먹이가 한결의 어깨에 살포시 앉았다. “흐음, 고민이 많구나, 한결. 너의 서사 스타일은 아버지와 다르다고 해서 나쁜 건 아니야. 오히려 그게 너만의 강점이 될 수도 있지. 아버지는 이야기를 ‘읽는’ 데 능숙하지만, 너는 이야기를 ‘만드는’ 데 능숙해. 너는 이야기를 단순히 보존하는 게 아니라, 끊임없이 재창조하고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는 거야.”


4.

하지만 그 재창조에는 위험이 따랐다. 연속되는 전투와 불안정한 서사 마법으로 인해 그의 기억마저 희미해져 가는 것 같았다. 마치 그의 이야기가 조금씩 ‘공백’으로 빨려 들어가는 것처럼. 그는 밤마다 책상 앞에 앉아 쉴 새 없이 스케치를 했지만, 그림들은 점점 더 추상적이고 불안정해져 갔다.

그때 윤지혜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한결, 아버지는 이야기를 관찰했지만 너는 이야기를 만드네… 하지만 관찰과 창조는 대립하는 것이 아니야. 관찰 속에서 창조의 씨앗이 피어나고, 창조를 통해 관찰이 더욱 깊어지지. 너는 아버지와 다른 방식으로 이야기에 다가가고 있을 뿐이야.”
그녀의 눈빛에는 이전보다 부드러운 온기가 담겨 있었다. “공백은 두려워할 대상이 아닐지도 몰라. 그것은 새로운 이야기를 위한 빈 공간일 뿐이야.”

그녀의 말은 마치 오래된 오르골 속 멜로디처럼 한결의 가슴을 저몄다. 하지만 그때, 서고 안쪽에 미세한 균열이 다시 생겨났다. 이번 ‘공백’은 이전과는 달랐다. 이야기 자체가 녹아내리는 듯했다. 책장 위의 책들은 페이지가 흐물흐물해지며 검은 잉크를 흘렸고, 현실 세계에도 미묘한 글리치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사람들의 표정이 순간적으로 일그러지거나, 건물 그림자가 잠시 흔들리는 현상이었다.

“디지털 시대의 그림자처럼 번져나가네.” 윤지혜는 긴장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야기가 너무 빠르게 소비되고 버려져, 그 잔상이 제대로 기억되지 못한 탓일 수도 있어.”
그녀의 말은 한결에게 묘한 동질감을 선사했다. 끊임없이 쏟아지는 이미지 속에서 길을 잃었던 자신의 무력함이 떠올랐다. 그는 주저하며 사서증을 손에 쥐었다. 그의 사서증은 다른 관리자들의 것보다 조금 더 투박하고 낙서투성이였다. 어릴 적 먹과 함께 낙서하며 시간을 보냈던 기억이 떠올랐다. 먹은 그의 내면 속 이야기를 자극하는 촉매제였다.

이번에는 조금 다르게 해보기로 했다. 한결은 사서증에 자신의 감정을 담아냈다. 불안함, 혼란스러움, 그리고 희망까지… 복잡하게 뒤섞인 감정들이 잉크처럼 사서증 위에 퍼져나갔다. 그는 그냥 흐름에 몸을 맡겼다. 그의 마법은 마치 자유로운 스케치처럼 거칠고 즉흥적이었다.
“이야기의 물결, 흐르라! 기억의 파도, 부딪혀라!”
한결의 외침과 함께 사서증에서 검은 잉크가 뿜어져 나왔다. 하지만 그의 마법만으로는 역부족이었다. ‘공백’은 좀처럼 물러서지 않고, 오히려 더욱 강력한 힘으로 이야기를 흡수하기 시작했다.

그때, 한결은 깨달았다. ‘공백’과의 싸움은 이야기 속 인물들의 고통과 슬픔을 함께 느끼는 싸움이라는 것을. 그는 사서증을 통해 이야기 속 인물들의 감정에 더욱 깊이 공감하려 노력했다. 왕국의 몰락을 슬퍼하는 여왕의 눈물, 전쟁터에서 죽어가는 병사의 마지막 외침, 사랑하는 연인을 그리워하는 시인의 애절함… 그 모든 감정이 한결의 마법에 스며들었다.

그 순간, 한결의 마법이 변화하기 시작했다. 거칠었던 잉크는 섬세한 빛깔로 변했고, 즉흥적인 스케치는 정교한 그림으로 완성되었다. 그의 마법은 더 이상 단순한 힘이 아니었다. 그것은 살아있는 이야기 그 자체였다. 그는 아버지와는 다른 방식으로, 자신만의 독창적인 ‘서사 스타일’을 구축해나가고 있었다.


5.

더 놀라운 것은 '공백'이 단순히 이야기만을 삼키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었다. 그것은 이야기 속 인물들의 감정까지 흡수하여 그들을 무감각한 존재로 만들어버렸다. 마치 소울리스 인형처럼. 윤지혜 또한 과거에 '공백'으로부터 간신히 벗어난 상태였다. 그녀의 눈빛에 어렸던 미묘한 불안감의 정체였다.

"우리가 싸우고 있는 건 단순한 망각이 아니야." 윤지혜는 나지막이 말했다. "이건 존재 자체의 의미를 지키는 싸움이야. ‘공백’은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모두 위협하는 존재야."
그녀가 가리킨 곳에는 서고 가장 깊숙한 곳에 위치한 거대한 문이 보였다. 문 너머에는 더욱 깊고 어두운 ‘공백’이 기다리고 있었다.

문이 열리자, 예상보다 훨씬 더 깊고 어두운 공간이 펼쳐졌다. 그곳은 현실과 꿈의 경계가 모호한 공간이었다. 익숙한 풍경들이 기괴하게 왜곡되어 나타나기도 했고, 완전히 낯선 장면들이 갑자기 눈앞에 펼쳐지기도 했다.
“저기 봐.” 윤지혜가 손가락으로 한 곳을 가리켰다. “저건… 서울의 지하철이야.”
어둠 속에서 희미하게 빛나는 지하철 객차 안에는 사람들 대신 그림자들이 앉아 있었고, 그들의 얼굴은 모두 공통적으로 무표정했다. 그때, 지하철에서 검은 그림자 하나가 천천히 걸어 나왔다.
“이야기는 결국 반복되는 허무일 뿐이지.” 그림자는 나지막하게 속삭였다. “기억해도 소용없어… 결국 모든 것은 ‘공백’으로 돌아갈 테니까.”

그림자는 한결에게 달려들었다. 그는 아버지에게 배운 서사 마법으로 그림자를 막아섰지만, 아직 미숙한 탓에 완벽하게 막아내지는 못했다.
그 순간 그는 깨달았다. ‘공백’과의 싸움은 자신의 내면 속에서 벌어지는 끊임없는 투쟁이라는 것을. 우리는 망각과 무력함에 굴복할 것인가, 아니면 기억과 의미를 붙잡고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갈 것인가?
그는 두 가지 길을 보았다. 하나는 ‘공백’에 온전히 잠겨 아버지처럼 완벽한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길. 또 하나는 불완전하고 흔들리더라도 나만의 이야기를 만들어가는 길. 망각에 굴복하여 아버지의 그림자가 되는가, 아니면 나만의 빛을 찾아 앞으로 나아가는가?

나는 깊게 숨을 쉬었다. 그리고 결심했다. 아버지에게 배운 서사 마법을 기반으로, 내 안의 불안과 회의감을 녹여낸 새로운 마법을 펼쳐냈다. 그것은 완벽하지 않았지만 진솔했고, 강렬했으며, 무엇보다 ‘나’ 다운 것이었다.
“나는 나만의 이야기를 만들겠어!”
나는 외쳤다. 그리고 마력이 그림자를 완전히 감싸 안았다. 그림자는 비명을 지르며 산산이 부서져 ‘공백’ 속으로 사라졌다.


6.

그림자가 부서진 잔해는 단순한 어둠이 아니었다. 세상의 색채가 미묘하게 희미해졌고, 주변의 형광등은 간헐적으로 깜빡였다. 국립도서관 서고 특유의 고요함 속에 섬세한 ‘노이즈’가 스며들었다.
나는 아버지의 트렌치코트를 움켜쥐었다. 그 무게는 수십 년간 쌓인 이야기들의 무게, 세계를 지탱하는 작은 기둥들의 무게였다. 그림자를 부수면서 나는 아버지의 마법을 상당 부분 흡수했다. 덕분에 ‘공백’의 침식을 잠시 막아낼 수 있었지만, 동시에 아버지의 불안과 고독도 함께 나누어 받았다.

"이제 네 안에도 그림자의 흔적이 남아있군.” 회복 중이던 아버지가 내 앞에 나타나 희미하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네 안의 이야기가 깨어났다는 건, 좋은 징조야.”
하지만 그 ‘좋은 징조’는 예상치 못한 결과를 가져왔다. 내가 사용한 마력은 예상보다 강렬했다. 서고 곳곳에 놓인 책들이 미세하게 흔들렸고, 몇 권은 갑자기 표지가 변색되거나 페이지가 떨어져 나갔다. 잠들어 있던 기억들이 깨어나 격렬하게 몸부림치는 듯했다.

윤지혜는 떨리는 손으로 찢어진 페이지들을 모았다. “서사의 마모 속도가 빨라지고 있어. 네 마력이 강력한 만큼, 주변 이야기들에게도 영향을 준 거야.”
나는 죄책감에 휩싸였다. 아버지와 함께 ‘공백’을 막기 위해 노력했지만, 결국 더 많은 이야기를 위협하게 된 것이다.

“이야기는 원래 그런 거야.” 아버지는 담담하게 말했다. “끊임없이 변화하고 재해석되는 존재이지. 중요한 건 망각되는 것을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서 새로운 의미를 발견하는 거야.”

그 순간, 서고 한쪽에서 희미한 빛이 새어 나왔다. 거대한 스크린처럼 빛나는 표면에는 수많은 얼굴들이 떠올랐다. 과거에 만났던 사람들, 이름조차 기억나지 않는 사람들, 꿈속에서 스쳐 지나갔던 사람들… 나는 그 빛, ‘반향’에 다가갔다. 그 속에서 나는 나의 삶을 돌아보았다. 미대 휴학생으로서 느끼던 무력감, 아버지와의 소통 부족, 그리고 먹과의 만남… 모든 순간들이 섬세하게 연결되어 하나의 거대한 이야기를 이루고 있었다. 하지만 그 이야기 속에는 잊혀진 추억들, 제대로 붙잡지 못했던 감정들 같은 빈틈도 많았다.
그리고 ‘반향’ 속에서 나는 가장 최근에 부순 그림자의 잔상을 발견했다. 그것은 단순한 어둠이 아니었다. 아버지의 불안과 고독, 그리고 그가 감춰왔던 슬픔이 응축된 것이었다.

“이제 네가 알게 되었으니 괜찮아.” 그는 부드럽게 말했다. “모든 이야기는 완벽할 필요는 없어. 완벽한 이야기는 존재하지 않아. 어쩌면 완벽함이란, 불완전함들을 끌어안는 과정일지도 몰라. 중요한 건 그 안에 담긴 진심이지.”
나는 아버지의 눈을 바라보았다. 그의 눈빛은 이제 더 이상 외롭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이야기를 나에게 넘겨주었고, 나는 이제 그 이야기를 이어받아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갈 차례였다. 반향 속에서 한 줄기 섬세한 균열이 생겼다. 균열 너머로 익숙하면서도 낯선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오래 전 아버지와 갈등했던 마법사, ‘카론’의 잔상이었다. 그의 냉소적인 미소는 앞으로 펼쳐질 새로운 위협을 예고하는 듯했다.


7.

“카론은 ‘공백’을 두려워한 게 아니었어.” 윤지혜가 나지막이 말했다. “그는 ‘공백’ 안에 새로운 이야기가 탄생할 가능성을 보았던 거야. 너무 많은 이야기에 질식된 세상에서, ‘공백’은 미세한 균열에서 뿜어져 나오는 생명력과 같다고 생각했지. 그는 이야기가 우리를 지배하는 것을 경계했어. 이야기라는 이름으로 포장된 관습과 권력에 맞서 싸운 거지.”
그녀의 말은 한결에게 묘한 울림을 주었다. 넘쳐나는 이야기 속에서 우리는 종종 진실을 놓치고, 표면적인 관계에 만족하며 살아간다. 카론은 그 지점을 간파했던 것이다.

먹이가 한결의 어깨에 살짝 올라앉았다. “둘 다 맞는 말이야. 이야기는 방패도 되고 감옥도 되지. 중요한 건 우리가 어떻게 이야기를 사용하느냐야. 기억이란 것은 원래 불완전하고 끊임없이 재구성되는 법이지. 완벽한 이야기는 존재하지 않아.”

그때, 서고 안쪽에서 미세한 균열이 생겨났다. 마치 깨진 거울 조각들이 모여 만들어진 불안정한 입구였다. 거울 속에는 익숙한 도시 풍경이 비쳤지만, 어딘가 뒤틀리고 왜곡되어 있었다. 도시 전체가 점차 ‘공백’에 잠식되고 있었다.
“‘이야기 마모’ 현상이 심화되었네.” 윤지혜가 분석적으로 말했다. “도시 전체가 점차 ‘공백’에 잠식되고 있어.”
한결은 거울 속 도시를 응시했다. 그곳은 현실과 닮았지만, 어딘가 슬프고 외로워 보였다. 그때 한결에게 새로운 은유가 떠올랐다. 도시는 거대한 이야기책이었고, 사람들은 그 책 속의 등장인물이었다. 하지만 그 책은 점점 낡아지고 페이지가 찢어져 나가면서 이야기는 제 의미를 잃어가고 있었다.

“이제 알겠어.” 한결은 결연한 표정으로 말했다. “우리가 지켜야 할 것은 단순히 과거의 이야기가 아니라, 앞으로 만들어갈 이야기야.”
그의 손에 들린 사서증이 은은하게 빛나기 시작했다. 아버지에게 물려받은 이야기는 이제 그의 손에서 새로운 의미를 찾아갈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는 아버지와 달리 좀 더 유연하고 직관적인 방법으로, 공동체의 연대를 통해 망각에 잠식된 도시에 활력을 불어넣을 것이다. 그는 아버지처럼 이야기를 방패로 사용할 것이 아니라, 이야기를 통해 세상을 변화시키는 연금술사가 될 것이다.


8.

다음 날 아침, 한결은 햇살에 눈을 떴다. 도시의 소음은 여전했지만, 그 속에서 희미한 이야기의 속삭임이 느껴졌다. 어젯밤 ‘공백’과의 전투 이후, 도시는 완벽히 망가지지도, 완전히 예전으로 돌아가지도 못한 채 미묘한 균열을 드러내고 있었다. 간판의 글자들이 뒤섞이고, 사람들의 그림자가 일그러지는 등 현실의 경계가 흐릿해지는 미세한 글리치가 도시 곳곳에 번져 있었다.

“망각은 완전히 없애는 게 아니라, 재배치하는 거야.”
아버지의 목소리가 귓가에 맴돌았다.

오늘 한결은 국립도서관으로 향했다. 더 이상 단순한 사서로서의 일상은 아니었다. 그는 이제 ‘서고 관리자’로서, 도시 곳곳에 퍼진 이야기의 조각들을 수집하고 재배치해야 했다. 중앙 데스크에 도착하자 윤지혜가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
“힘들었죠? ‘공백’이 꽤나 강하게 밀어붙이던데요.”
“네.” 한결은 짧게 대답하며 사서증을 꺼냈다. 그의 사서증은 아버지의 것보다 조금 더 잉크 번짐이 많았지만, 그만큼 이야기에 대한 그의 감수성이 풍부하다는 증표였다. 윤지혜는 그의 사서증을 유심히 살펴보더니 미소를 지었다. “점점 당신만의 스타일이 드러나는 것 같아요. 좀 더 대담하고, 직관적이죠.”
“그냥… 좀 더 솔직해지려고요. 아버지처럼 완벽하게 이야기를 통제하려고 하기보다는, 이야기 자체를 즐기면서 풀어내고 싶어요.”
“좋아요. 당신에게 맞는 방식이죠. 오늘 당신에게 맡겨진 임무는 ‘종착역’ 주변의 이야기들을 수집하는 거예요. 최근 그곳에서 사람들이 기억을 잃어버리는 현상이 자주 발생하고 있대요.”

종착역은 서울 외곽의 허름한 기차역이었다. 도시 변두리에서 힘겹게 살아가는 사람들의 희망과 절망이 뒤섞인 공간. 한결은 역 광장에서 특이한 장면을 목격했다. 한 남자가 끊임없이 같은 자리를 빙글빙글 돌고 있었다. 그의 얼굴에는 혼란과 절망이 가득했다.
“괜찮으세요?”
남자는 잠시 멈춰 서서 한결을 바라봤다. “기억이… 기억이 안 나요. 내가 누구인지, 어디에서 왔는지… 전부 다.”
한결은 남자의 손을 잡고 사서증을 그의 손바닥에 가져다 댔다. 은은한 빛이 흘러나오자 남자의 눈빛이 조금씩 또렷해졌다.
“아… 나는 김철수라고 해요. 건설 현장에서 일하는 노동자예요.” 그는 희미하게 미소 지었지만, 곧 불안에 휩싸였다. “하지만… 뭔가 중요한 걸 잊어버린 것 같아요.”

그때였다. 김철수의 주변 공간이 노이즈처럼 일렁이기 시작했고, 그의 모습이 점점 흐릿해졌다. ‘공백’이 다시 침식해 들어오고 있었다. 한결은 즉시 ‘서사 마법’을 사용했다. 그는 김철수의 이야기를 머릿속으로 빠르게 그려냈다. 그가 가장 좋아하는 트로트 노래, 가장 그리워하는 아내와 딸의 얼굴, 매일 밤 꿈꾸던 자신의 작은 건설 현장 사무실… 모든 것을 이미지화하여 그의 주변에 펼쳐놓았다.
마법 덕분에 김철수는 잠시 ‘공백’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다. 하지만 그의 얼굴에는 여전히 불안감이 남아있었다.
“이야기는… 계속 변하잖아요. 오늘 기억했던 내용도 내일이면 또 달라질 수 있어요.”
그의 말은 한결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진정한 망각이란, 끊임없이 변화하는 이야기 속에서도 발생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아버지와 달리 좀 더 유연하고 직관적으로 이야기를 풀어내야 했다. 공동체의 연대를 통해 새로운 가치를 창조하고 망각에 잠식된 도시에 활력을 불어넣어야 했다.

김철수의 손은 차가운 흑요석 같았다. 한결은 그의 손을 더욱 힘주어 잡았다. 망각이란 단순히 과거를 잃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현재를 더욱 소중히 여기도록 만드는 촉매제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을. 단순히 기억을 되살리는 것을 넘어, 파편화된 이야기를 짜 맞추고 함께 새로운 태피스트리를 만들어나가면서 말이다.

도서관 중앙 데스크로 돌아온 한결을 윤지혜가 미묘하게 달라진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완벽주의적인 냉철함은 흔들리고, 그녀의 눈빛은 얕은 호수에 떨어진 돌멩이처럼 잔잔한 파문을 일으키고 있었다.
“새로운 ‘노이즈’가 발생했습니다.” 그녀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낮고 떨렸다. “이번엔 단순한 시각적 글리치나 소음이 아니에요. 사람들의 ‘이야기’ 자체가 조금씩 엇갈리기 시작하고 있습니다. 마치 잘 짜여진 직물에 보이지 않는 칼날이 스치듯, 세상의 질서가 미세하게 흔들리고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한결은 국립도서관 앞 광장으로 나섰다. 평소 북적거리던 광장은 어딘가 쓸쓸한 초원처럼 텅 빈 느낌이었다. 사람들은 서로의 이름을 잊거나, 어제 있었던 일을 다른 시간대에서 일어난 일처럼 기억하거나, 심지어 자신의 직업이나 가족 관계조차 혼동하기 시작했다. ‘공백’은 단순히 과거를 지워버리는 것이 아니라, 현재를 끊임없이 재해석하며 혼란을 가중시키고 있었다.

그때 한결의 눈에 씀바귀꽃처럼 낡은 사진 한 장이 들어왔다. 누군가가 떨어뜨린 사진 속에는 젊은 연인들이 환하게 웃고 있었다. 뒷면에는 ‘우리의 첫 데이트, 영원히’라는 문구가 적혀 있었다. 하지만 사진 속 연인들의 얼굴은 조금씩 변형되고 있었다. 남자의 얼굴은 점점 더 낯설게 느껴졌고, 여자의 얼굴은 희미하게 사라져 갔다.

망각은 검은 잉크처럼 조용히 스며들어, 우리의 이야기를 희미하게 만들어간다. 하지만 그 잉크는 때로는 새로운 색을 만들어내기도 한다. 한결은 아버지에게서 물려받은 사서증을 손에 꽉 쥐었다. 그것은 그의 존재 자체를 증명하고, 그가 지켜온 이야기들의 흔적을 담고 있는 일종의 ‘이야기 지문’이었다. 손 안에서 사서증은 따스하게 빛났고, 희미하게 떨리고 있던 그의 용기를 북돋아 주었다.

“또다시 시작이군요.” 먹이가 그의 어깨 위로 날아와 속삭였다. “이번엔 좀 더 미묘하지만 훨씬 강력한 힘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윤지혜는 잠시 생각하더니 입을 열었다. “ ‘공백’이 이번엔 ‘이야기’ 자체의 연결 고리를 끊으려고 하는 것 같아요. 모든 이야기가 독립적으로 존재하게 되면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풍부해지는 시너지가 사라질 거예요. 마치 별들이 제 각자의 빛만 내뿜다가 결국 블랙홀에 빨려 들어가듯.”

한결은 다시 광장의 사람들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그는 그들의 눈을 바라보며 속삭였다.
“당신의 이야기는 무엇인가요?”
그의 질문은 단순한 호기심 이상의 의미를 담고 있었다. 그것은 망각에 잠식된 세상에서 자신들의 존재를 확인하고, 서로 연결되려는 간절한 외침이었다. 그리고 그 외침 속에서, 한결은 새로운 희망을 발견했다. 비록 이야기가 끊임없이 변화하고 재구성된다 하더라도, 우리는 서로의 이야기를 통해 의미를 찾고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을 말이다.

그때 그의 눈에 한 줄기 빛이 들어왔다. 어느 노인이 아내의 손을 잡고 환하게 웃고 있었다. 마치 오래된 책처럼, 그들의 이야기는 닳고 낡았지만, 여전히 아름다운 빛깔을 발산하고 있었다. 이야기는 결국 살아있는 것이라는 걸 깨달았네. 한결은 미소지으며 생각했다.

그의 시선이 한 여성에게 머물렀다. 그녀는 아들이라고 주장하는 두 남자를 번갈아 바라보며 혼란스러워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의 눈빛에는 절망보다는 흥미로운 궁금증이 가득했다. 그녀는 두 남자에게 차례대로 질문을 던지며, 세 사람이 함께 웃기 시작했다. 마치 세 개의 조각 퍼즐이 맞춰지는 것처럼, 그녀와 두 남자는 조금씩 서로에게 가까워졌다. 망각조차도 새로운 만남과 연결을 위한 기회가 될 수 있구나.

한결은 사서증을 더욱 꽉 움켜쥐었다. 이제 그는 단순한 사서가 아니었다. 그는 망각과 싸우고 이야기를 되살리는, 진정한 ‘이야기꾼’이었다. 그의 첫 번째 장이, 이제 막 시작되고 있었다.

keyword
월, 화, 수, 목, 금, 토, 일 연재
이전 12화셰프, 악마에게 레시피를 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