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가 온다. 이런 날은 맑았던 어제보다는 확실히 얼마정도는 더 센치해지는 기분이다. 누구말마따나 적당한 온도와 습도로 쾌적함을 한껏 높여놓은 집에서 창문을 통해 떨어지는 비를 바라보는 건 낭만에 가깝지만, 막상 우산을 쓰고 밖에 나가 시멘트나 흙따위가 축축한 비에 젖어 깊숙히 안쪽에서부터 올라오는 그 냄새를 맡으며 걷는 것은, 녹고 있는 아이스크림을 발을 동동대며 바라보는 것과 비슷한 감상이 든다.
서둘러 해결하고 싶은 조바심이 든다는 말이다.
하지만 그래도 가끔은, 그 익숙한 내음에 시간을 담아볼만큼의 여유가 생기기도 한다.
벌써 시간이 그렇게나 지났나 싶지만 꽤나 옛날이 되어버린 것이 자명한, 오래 전의 어린 시절, 비오는 날이면 집으로 바로 가기보다 우산을 옆으로 걸쳐 쓰고는 슬슬 한쪽 어깨가 젖어오는 그 눅눅함을 즐기며 학교 옆 담벼락을 몇 바퀴나 빙빙 돌며 서성거리던 꼬마였던 내가 있었다.
검붉으면서도 하얀, 미묘하게 여러색이 섞여있는 벽돌 사이의 빈틈, 어떻게 저런 곳까지 흙이 들어갔을까 싶은 모래투성이의 구석을 뚫어지게 보면 그리 어렵지 않게 얇은 막의 껍질을 멋지게 휘감고 있는 딱딱 말랑해보이는 달팽이가 더듬이를 길쭉하게 내민 채로 여유롭게 기어가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 모습이 얼마나 경이롭고 신비해보였는지, 나도 모르게 초록색 채집통을 꺼내 한마리 한마리 보석을 담는 듯한 느낌으로 소중히 담아 설레는 마음으로 집까지 정중히 모셔가곤 했다.
딸의 이런 요상한 행동을 나무라지 않던 이해심 많은 어머니가 챙겨주신 상추 한장이면, 오늘 데려온 달팽이 다섯마리가 일주일은 너끈히 먹고도 남을 양처럼 충분해보여서 나의 마음도 한껏 푸근해졌다. 물론 하루면 검고 얇은 똥으로 범벅이 되 다시 새 상추로 바꿔줘야 했지만 말이다.
아끼는 마음을 담아 조심스럽게 검지 손가락 하나를 쓰윽 내밀어 달팽이의 더듬이 위에 살짝 올려보면, 금새 그것이 얕게 줄었다가도 이내 조금씩 길쭉하게 올라오는데, 그 모습에도 감탄을 하며 한참을 쳐다보고 앉아 있던 노란색 동심이 그곳에 있었다.
향은 기억을 껴안고 가슴으로 파고드는 재주가 있다. 가끔 이렇게 비가 오는 날, 들이마신 숨 안에 들어있는 흙냄새를 맡으면, 그 시절의 내 얼굴은 가물가물할지언정, 그 때 느꼈던 감정만큼은 은근하게 떠올라 그리움으로 사무친다.
빨리 키가 크고 싶었던 꼬마는 기껏 어엿한 어른이 되었는데, 다시 작아지고 싶어져버리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