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아탑에 틀어 박힌지 닷새 째

주절 주절 혼잣말

by 무명


나는 시간을 죽이는 중입니다


정오가 다 돼서야 부스스한 머리를 긁적이며 잠에서 깬다. 만사에 권태로움을 느껴 고향으로 내려온지 오늘로 닷새째, '아, 오늘도 생기 없는 하루를 보내겠구나.' 머릿속이 장막으로 뒤덮인 기분이다. 희뿌연 안개가 눈 앞을 가로막고 있는 듯하다.


거울 속을 가만히 들여다 보면 동태 눈깔을 한 백수 건달이 들어 앉아 있다. 머리는 너저분하게 길어 정리가 안되고 며칠 째 수염도 깎지 않은 몰골이다. 한심하기 짝이 없다. 지금의 생활도 이대로 나쁘지 않다고, 지금의 나는 휴식이 조금 필요한 상태라고 애써 나 자신을 변호한다.


누구에게도 잘 보일 필요가 없으니 얼굴에 물조차 묻히지 않는다. 당연하다는 듯 양치질도 생략한다. 덕지덕지 들러붙은 눈곱을 으적으적 떼어내며 정수기에서 물을 한 컵 받아 마신 뒤 맑은 공기를 마실 요량으로 대문 밖으로 나선다.



'내일은 생산적인 일을 한 가지라도 해야지'라는 전날 밤의 다짐은 하룻밤 새에 어디로 가버렸는지 늦은 아침 겸 점심을 먹고 나면 침대로 슬그머니 기어 들어간다. 텔레비전을 켜고 채널을 이리저리 돌리다 식곤증을 이기지 못하고 나도 모르게 곯아 떨어진다.



삼십 분이 지났을까, 집에 있으면 아침 일찍 일어나 운동도 하고 끼니 좀 거르지 말라는 사랑 듬뿍 담긴 잔소리와 함께 과일이 스윽 들어온다. 귀에 딱지가 앉을 정도로 들은 말이라 나도 모르게 신경질을 내고 만다. 그 누구도 들어주지 않을 내 짜증을 받아줄 사람이 할머니 밖에 없다는 사실을 되바라진 나는 너무나도 잘 알고 있던 것이다.


할머니의 성화에 뾰로통하여진 나는 집 안이 갑자기 답답해져 책장에서 아무 책이나 뽑아 들고선 밖으로 나선다. 며칠 째 계속 하늘이 희끄무레한 것이 영 못마땅하다. (언제는 비가 오는 게 좋다더니...)



아무렇게나 쌓여 있던 믹스 커피를 찢어 마시는 것도 벌써 질려버렸다. 오늘은 제대로 된(?) 커피가 마시고 싶어 동네 이곳저곳을 기웃거리다 적당하다 싶은 곳을 발견하고 기쁜 마음으로 문을 밀고 들어간다. (카페 사장님에게는 미안한 말이지만) 손님이 별로 없고 노랫소리도 은은하게 깔려있는 덕에 기분이 한결 가벼워진다.



가지고 온 책을 펼쳐 보지만 글이 눈에 영 들어오지 않는다. 뭔가 재밌는 게 없을까 하고 다시 장만한 휴대폰을 뚫어지게 들여다 본다. 전에 썼던 글들을 실눈을 뜨고 훔쳐 보듯 꺼내 읽는다. 당장이라도 이불을 걷어 차고 싶은 충동이 인다. 얼굴이 화끈거려 가지고 온 책 뚜껑을 열었다 닫았다 하기를 수 없이 반복한다.


이렇게나 제멋대로인 나는 이대로 괜찮은 걸까. 애꿎은 할머니에게 분풀이한 것이 뒤늦게 후회가 되어 물 밀듯 밀려 온다. 푹신한 침대가 가시 방석처럼 느껴지는 것이 스물일곱 해를 바라보는 캥거루에게 마냥 편하지만은 않다. 친구의 글이 자꾸만 머리에 맴돌아 오늘도 이른 시간에 잠이 들긴 글렀다. 오늘 밤은 쓰린 가슴을 무엇으로 쓸어내리나, 채우면 채울수록 허전한 것은 또 무엇 때문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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