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에는 부처가 없다

불교는 불교가 아니다

by 무명

저의 글은 모두 부처님 가르침을 기반으로 쓰여집니다. 불교와 관련된 단어를 많이 사용하지는 않지만 사성제, 삼법인, 연기법, 중도, 공. 이것이 전부입니다. 출처 또한 따로 표기하지 않았습니다. 불교 용어를 사용함으로 인해 종교적 뉘앙스가 보이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인도에서 중국으로, 중국을 거쳐 우리나라로 불교가 전파되면서 우리가 접하는 경전과 교리는 모두 한문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한문이 익숙하지 않은 세대나 불교의 가르침이 어렵다고 생각을 하는 사람들을 위해 오늘날 흔하게 사용하는 쉬운 단어와 말로 대체하고자 합니다. 하지만 저의 생각과 글은 온전히 저의 것이 아님을 미리 밝히고자 이 글을 쓰게 되었습니다.


불교 이야기를 하면서 절에는 부처가 없다니, 부처님의 가르침을 이야기한다고 하면서 앞뒤가 이렇게나 맞지 않을 수 있을까 싶습니다. 불경도 이런 불경이 없습니다.

하지만 불교역사에 이런 일은 아주 흔합니다. 육조단경에는 “다만 견성을 말할 뿐, 선정과 해탈은 말하지 않습니다. “라는 대목이 나오며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해탈을 부정합니다. 하지만 이보다 더 한 말을 한 사람도 있습니다. 당나라 선사였던 임제스님은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를 만나면 조사를 죽여라”라고 말했습니다. 말씀이 그대로 진리인 다른 종교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실재는 말로 표현할 수 없습니다. 언어는 실상을 관념의 테두리 안에 가두어 버립니다. ‘부처’라는 단어는 불교신자에게 깨달음을 성취하신 가장 고귀하신 분으로 해석되겠지만 다른 누군가에게는 다시 부활하지 못한 나약한 인간으로 보이거나 이 생이 끝나고 지옥으로 떨어질 불쌍한 이들의 우상으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생각의 대상은 언어로 표현되고 언어로 표현된 것은 허물을 지닐 수밖에 없습니다. 해탈이라는 단어는 해탈 그 자체가 아니기에 해탈을 부정합니다. 부처라는 말 역시 부처의 실재를 드러내지 못하는 하나의 관념일 뿐입니다. 부처를 죽이라는 말은 인간 부처가 아닌 관념의 부처를 죽이라는 의미입니다.

금강경에는 “수보리야, 이른바 불법이라고 말하는 것은 곧 불법이 아니다”라는 구절이 나옵니다. 불교에 대해 공부하면 할수록 이 공부는 불교가 아니라는 사실이 점점 확고해집니다. 불교는 이름이 불교이지, 불교가 아닙니다.


우리가 흔히 아는 깨달음을 얻는 수행법으로 염불, 독경, 기도, 참선이 있는데 염불과 독경, 기도는 모두 부처님 사후에 생겨난 것이고 부처님 또한 선정에 드는 것으로는 깨닫지 못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오로지 설법하셨고 제자들은 법문을 듣기만 했습니다.


절은 불·보살상과 벽화, 단청 등 온갖 장엄으로 꾸며져 있습니다. 이러한 화려한 장식은 부처님의 깨달음이 얼마나 위대하며 그 권위가 얼마나 높고 깊은지를 드러내고, 사찰이라는 공간 자체가 곧 불국정토임을 상징합니다.

대부분의 사찰은 산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산은 속세와 거리를 두기 쉬운 공간으로, 소음과 번잡함이 적어 수행자가 마음을 가라앉히고 정진하기에 적합합니다. 불교에서 수행은 외부 자극을 줄이고 자신의 마음을 관조하는 데서 출발하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산이 선택되었습니다.

불교가 전래된 이후 절은 국가의 후원을 받기도 했지만, 정치적 변화나 탄압의 시기에는 도심보다 산이 상대적으로 안전한 피난처였습니다. 그 과정에서 산중 사찰의 전통이 굳어졌습니다.


계율에 삼정육을 먹지 말라하셨지 육식을 철저히 금하라 하지 않으셨고, 오신채를 먹지 말라하지 않으셨습니다. 마늘을 먹지 마라는 계율을 세우긴 했지만 이 역시 약으로 쓰일 때는 먹어도 괜찮다고 하셨습니다. 공양받은 것은 가리지 않고 먹어야 하는 상황에 고기나 오신채를 빼고 먹는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입니다. 결코 계율은 어겨서는 안 되는 절대적인 지침이 아닙니다.

불교의 경전은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방대합니다. 모든 가르침을 하나하나 공부하다 보면 평생을 바쳐도 부족할지 모릅니다. 불교에서는 이를 두고 모든 가르침은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에 불과하다고 말합니다. 생각과 말, 글은 손가락이지 달 그 자체가 아닙니다.


강을 건너기 위해서는 뗏목이 필요하지만, 강을 건넌 뒤에는 그 뗏목을 버려야 합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모든 경전과 계율, 논서는 깨달음에 이르게 하는 방편일 뿐, 그 자체가 목적은 아닙니다.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


산을 생각합니다. 산에 대한 이미지가 저절로 떠오릅니다. 머릿속에 떠오른 산에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갑니다. 계곡을 만났습니다. 계곡은 산일까요, 물일까요.


凡所有相皆是虛妄 若見諸相非相 卽見如來
범소유상개시허망 약견제상비상 즉견여래
만일 모든 형상이 다 형상이 아닌 줄을 보게 된다면, 즉시 부처님을 보리라.


금강경의 핵심 가르침이 담긴 구절입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산을 산이라는 형상으로 보았고, 물을 물이라는 형상으로 보았습니다. 하지만 조금만 사유를 해보아도 산은 산이 아닌 것으로 이루어져 있고, 물은 물이 아닌 것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산은 자성이 없고 물 또한 자성이 없습니다. 산은 산이 아니고 물은 물이 아님을 알게 됩니다.


若以色見我 以音聲求我 是人行邪道 不能見如來
약이색견아 이음성구아 시인행사도 불능견여래
만약 형상으로 부처님을 보려 하거나 소리로 부처님을 구하면, 이는 삿된 길을 가는 것이니, 부처님을 볼 수 없다


부처님 열반 이후 2,500년이 흐르는 동안, 부처님에 대한 다양한 해석과 환상, 그리고 문화와 역사가 축적되어 오늘날의 불교라는 종교를 형성해 왔습니다. 그러나 사찰과 장식, 계율, 경전, 수행, 교리와 같은 요소들은 모두 형상에 불과합니다. 이들은 인류의 문화유산으로써, 깨달음에 이르는 부수적인 요소로써 가치가 있겠지만 그 자체가 본질은 아닙니다


불상은 부처의 모습을 본떠 만든 것일 뿐, 그 자체는 돌덩이이거나 나뭇조각, 청동이나 흙에 지나지 않습니다. 절에는 우리가 생각하는 부처가 없습니다.


우리의 생각은 언제나 형상과 맞닿아 있기에, 우리는 그동안 형상만을 보아왔습니다. 그래서 형상이 아닌 것을 어떻게 볼 수 있는지 의문이 들지도 모릅니다.


방법은 아주 간단합니다. 생각을 멈추고 그저 보기만 하면 됩니다. 생각이 일어나면 생각이 일어나는 것을 봅니다. 나는 내 안에 부처를 보고 지금 여기가 도량임을 알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