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일의 금요일, 4시 44분

4시 44분도, 13일의 금요일도 지나간다

by 무명

저는 요즘 새벽 여섯 시에 목욕을 하러 갑니다.

하지만 오늘은 가지 않기로 결심했습니다.


새벽에 목욕탕에 가면 간접적으로 사문유관을 경험해야 되기 때문입니다.


새벽의 목욕탕은 온갖 괴로움으로 가득합니다.

어제는 드라이기를 발에 갖다 대고 말리는 아저씨를 보았습니다.


멀리서 말리는 거야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지만

이해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선 간격이었습니다.


여탕은 어렸을 때 이후로 가본 적이 없어 잘 모르겠지만,

남탕에서는 상상조차 하지 못한

온갖 추잡스러운 일들이 벌어집니다.


보기 싫은 마음

호수만하니

눈을 감을 수밖에 없습니다.


새벽의 목욕탕은

괴로움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사람의 기억에 커다란 영향을 미치는 요소는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자극의 강도와 자극의 빈도입니다.


어린 시절 겪은 강렬한 충격이

오랫동안 트라우마로 남는 현상은,

자극의 강도가 기억에 얼마나 깊은 흔적을 남기는지 잘 보여줍니다.

어제의 기억이 오늘 제가 목욕탕에 가기 싫은 감정을 만들어낸 것처럼 말입니다.


반대로, 학습 과정에서

반복 훈련이 효과적인 이유는

자극의 빈도가 기억을 공고히 하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이미 알고 있습니다.


이 관점을 바탕으로 한 인간의 여정을 다시 돌아보겠습니다.


저도 공부했던 것을 복습하지 않는 바람에

잊어버리게 된 것이 너무나도 많습니다.




고타마 싯다르타는 왕자의 삶을 버리고 진리를 찾아 길을 떠났습니다.

그가 마주한 시대의 공기는 분명했습니다.


고타마가 북문에서 마주한 사문은 명상이나 고행을 통해 괴로움으로부터 벗어나는 방법을 찾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는 알라라 칼라마와 웃다카 라마풋타라는 당시 인도 최고의 선정주의자를 찾아 선정(禪定)을 익혔고, 당시 수행자들이 도달할 수 있는 최고의 정신적 경지를 빠르게 체득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거기서 멈추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해탈’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이후 그는 다섯 수행자와 함께 극단적 고행에 들어가게 됩니다.

음식을 거의 끊다시피 하였고, 숨을 멈추는 수행을 반복했습니다.


살은 사라지고, 갈비뼈가 드러났습니다.

전해지는 기록에 따르면 배를 만지면 등뼈가 닿을 정도였다고 합니다.


6년 간의 고행으로

한 가지 사실이 분명해졌습니다.


고통은 지혜를 낳지 않는다는 사실


육체를 파괴하는 일은

욕망을 꺾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생존 본능을 더욱 선명하게 만들 뿐이었습니다.


죽음의 문턱에서 싯다르타는

어린 시절 농경제에서 느꼈던

평온한 선정의 기억을 떠올렸습니다.


그는 깨달았습니다.


"거문고 줄은 너무 팽팽하면 끊어지고, 너무 느슨하면 소리가 나지 않는다."


극단적인 고행은 깨달음의 도구가 아니라,

또 다른 집착이자 고통일 뿐이었습니다.


그는 단식의 고행을 멈추고

네란자라 강에서 몸을 씻은 뒤,

마을 처녀 수자타가 공양한 우유 죽을 받아먹었습니다.


이 행위는 함께 수행하던 도반들에게

변절자로 비난받는 계기가 되었지만,

싯다르타에게는 육체와 정신의 균형을 되찾아

깨달음으로 나아가는 실질적인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기력을 회복한 그는 보리수 아래 자리를 잡고 앉아

스스로에게 맹세했습니다.


"깨달음을 얻지 못한다면

이 자리에서 결코 일어나지 않으리라."


이때 그의 내면에는

온갖 유혹과 공포(마라)가 엄습했습니다.

세속적 욕망, 죽음에 대한 공포, 과거에 대한 후회가 그를 흔들었으나,


싯다르타는 흔들림 없는 집중력으로 이를 물리쳤습니다.


마침내 새벽별이 떠오르는 순간,

그는 존재의 연기적 본성(모든 것은 원인과 결과로 연결되어 있음)을 꿰뚫어 보았습니다.


고통의 근원인 무명(無明)이 사라지고, '나'라는 실체에 대한 집착이 소멸하는 순간이었습니다.


고행을 버린 것은 나약함이 아니라, 수단에 매몰되지 않고 목적을 향해 나아가는 용기였습니다. 그는 더 이상 고행자 싯다르타가 아닌, 깨달은 자인 '붓다'로서 다시 태어났습니다.


그리고 깨어남에 대한

오늘의 저만의 방편을 안내드리면서

오늘의 글을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바다는 나의 고향이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모든 생명의 고향이다.


아득한 시간 이전, 아직 이름도 의미도 없던 세계에서

미세한 분자들이 우연히 결합했고

그 우연은 반복되며 필연이 되었다.

숨 쉬지 못하던 것들이 숨을 배우고,

움직이지 않던 것들이 방향을 갖기 시작했다.


그 최초의 떨림이

오늘의 나로 이어진다.


바다 속에서 생명은

먼저 견디는 법을 배웠다.

뜨거움과 차가움, 압력과 결핍 속에서

살아남는 것이 곧 존재의 이유였던 시절.


지느러미는 방향을 만들었고

아가미는 리듬을 만들었다.

그 리듬이 수억 번 반복되며

‘살아 있음’이라는 감각이 태어났다.


그러다 어떤 생명은

바다를 떠난다.

아마 용기라기보다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을 것이다.


육지는 가혹했다.

물은 부족했고, 중력은 무거웠으며,

숨은 더 이상 공짜가 아니었다.


그러나 생명은 늘 그래왔듯

환경에 항의하지 않았다.

대신 형태를 바꾸었다.


아가미는 폐가 되었고

지느러미는 다리가 되었다.

비늘은 벗겨지고

피부는 외부를 느끼기 시작했다.


고통은 진화의 연료였다.

실패한 수많은 생명 위에

성공한 몇 줄기의 흔적만 남았고,

그 흔적이 다시 다음 세대로 이어졌다.


시간은 잔인할 만큼 길었다.

빙하기와 대멸종,

불과 물, 운석과 화산을 지나며

생명은 계속해서 삭제되었다.


그러나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았다.

언제나 다음 시도가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수만 세대, 수십만 세대,

셀 수 없는 조상들의 선택이

하나의 방향으로 수렴했다.


보고, 듣고, 기억하고,

마침내 생각하는 존재.


그리고 지금,

나는 여기 있다.


바다의 기억을 품은 몸으로

육지 위에 서서

과거를 되짚고 미래를 걱정한다.


내 혈관 속 염분 농도는

아직도 바다와 닮아 있고,

내가 이유 없이 물을 그리워하는 이유도

아마 그곳에 있을 것이다.


나는 하루아침에 만들어진 존재가 아니다.

수억 년의 시행착오가

잠시 인간이라는 형태로

나를 통과하고 있을 뿐이다.


그러니 오늘의 실패쯤은

조금 덜 비극적이어도 괜찮다.

이 정도의 흔들림은

생명에게 늘 있었던 일이니까.


바다에서 태어나

육지로 올라와

수만 세대를 지나

지금의 내가 되기까지


나는 이미

충분히 오래,

충분히 잘

살아남아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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