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국엔 겨울이 있어?" 주변인들의 질문에 나는 이렇게 대답하곤 했다.
"여름, 비 오는 여름, 건조한 여름이 있어."
설마 12월엔 조금 시원하겠지라고 생각했는데 이틀이나 사흘 정도 약간 쾌적한 날이 있을 뿐 일 년 열두 달 내내 여름이었다. 태국에 온 지 일주일쯤 되던 날인가 함께 근무하는 태국 선생님과 점심을 먹으려고 건물을 나섰다.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에 쨍한 해를 보고 '선생님, 오늘 날씨가 좋네요.'라고 했더니 태국 선생님께서 막 웃으시면서 '태국 사람들은 오늘처럼 더운 날을 좋은 날씨라고 하지 않을걸요.'라고 하신다.
더위를 많이 타는 나는 태국에서의 첫 2개월이 무척 힘들었었다. 하루 종일 별 일 하지 않았는데도 퇴근하고 집에 오면 손 하나 까딱 하기 싫은 무기력함이 찾아왔다. 흔히 '더위 먹었다'라고 표현하는 그 무기력함과 피로였다. 다행히 시간이 지나면서 조금씩 나아졌고, 건기라고 불리는 건조한 여름이 찾아오면서 그럭저럭 견딜만하게 되었다.
찌는 듯이 더운 태국에서 장기간 살면서 요긴하게 사용한 물건들이 있는데 그중 하나가 바로 우산 겸 양산이다. 양산으로도 쓸 수 있고 우산으로도 쓸 수 있는 제품을 가져왔는데 나는 하루도 빠지지 않고 매일 양산을 사용했다. 해가 나는 날은 눈을 못 뜰 정도로 볕이 강했고, 어차피 오토바이를 타려면 훌렁 벗겨지는 모자보다는 양산이 요긴했다.
오토바이 택시를 타고 가다 신호에 걸리면 꼼짝없이 아스팔트 위에서 강한 햇볕을 쐬고 있어야 했는데 그때마다 양산을 펼쳐 잠깐이나마 해를 가렸다. 신기하게도 태국의 교통 신호등에는 운전자들을 위한 타이머가 있어서 언제 양산을 접고 오토바이 뒷좌석 손잡이를 잡아야 할지 미리 알 수 있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나의 양산은 일종의 트레이드 마크가 되어 멀리서 걸어오는 내 모습만 보고도 학생들이나 학교 수위 아저씨도 나를 알아보았다. 사실 동네가 작고, 매일 내가 다니는 길이 같기 때문에 주변 동네 사람들은 내가 누군지 알고 있었다. 오토바이 택시 아저씨들도 퇴근 후 나의 주 목적지가 동네에 하나밖에 없는 쇼핑몰 또는 집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고, 목요일마다 열리는 야시장의 아보카도 주스 가판대 아주머니도 내가 좋아하는 음료가 뭔지 알고 계셨다. 태국어 귀머거리 벙어리인 나였지만 간혹 가다 들리는 '까올리'(한국인)이라는 말은 귀신같이 알아듣고 헤벌쭉 웃어주었고, '아짠'(선생님)이라는 단어가 들리면 '차이.. 차이'(네, 네)하면서 나를 알아봐 주는 사람들에게 고마움을 표시했다.
한국에서는 잘 쓰지도 않던 양산을 득달같이 쓰고 다녔던 데에는 한 가지 이유가 더 있었다. 태국에 도착한 지 3일째 되던 날, 태국 선생님과 함께 계좌를 열기 위해 은행을 방문했었다. 서류 여기저기에 서명을 하고, 마침내 통장과 카드를 받아 들던 순간, 은행 직원이 웃으면서 태국어로 뭐라고 하길래 어리벙한 얼굴로 옆에 앉은 태국 선생님을 바라보았다.
"선생님 피부가 하얗고 너무 예쁘대요."
'예쁘대요'라는 그 한 마디에 기분이 좋아서 내가 아는 유일한 태국어인 '컵쿤카' (고맙습니다)를 남발하며 붕 뜬 기분으로 은행 문을 걸어 나왔다. 태국 선생님께서 설명해 주시기로는 태국 여자들은 피부가 깨끗하고 흰 것을 가장 큰 미의 기준으로 친다고 했다. 나는 한 번도 한국에서 예쁘다는 칭찬을 들어본 적이 없지만 내 피부가 희고 깨끗한 편이라는 점은 확실했다. 그 이후로 태양으로부터 흰 피부를 지켜내기 위한 전쟁이 시작된 것이다. 유일한 장점인 하얀 피부를 포기할 수 없어서 현관만 나서면 양산을 펼쳐 들었다.
내가 사는 콘도 모퉁이를 돌아 나오면 '토피 케이크'라는 작은 디저트 가게가 있다. 땅콩과 견과류를 카라멜과 함께 졸여 토피를 만든 다음 커피맛이 나는 작은 스펀지 케이크 위에 얹은 것인데 이 지역에서는 여러 개의 지점을 낼 정도로 인기 있는 디저트 가게이다. 커피와 음료도 꽤 맛이 좋고 저렴해서 아침마다 나는 토피 케이크에 들러 커피를 사고 케이크도 사곤 했다.
하루는 계산을 하는데 토피 케이크 아주머니께서 태국어로 뭐라고 하시길래 정신을 차리고 그 단어를 잘 기억해두었다. 헐레벌떡 학과 사무실에 도착하자마자 조교 학생에게 '수아이'가 무슨 뜻이에요?라고 묻자 학생이 웃으면서 대답해 주었다. 선생님 그건 '예쁘다'라는 뜻이에요.
그동안 흰 피부를 지켜낸 보람이 있었나? 갑작스럽게 들은 '수아이'라는 칭찬에 또 기분이 좋아졌다.
'아... 미인으로 사는 것이 이런 기분이었구나.'
말도 안 되는 자아도취에 빠져 3시간 연강 수업도 신나게 하고 실실 나오는 웃음을 참으면서 하루를 기분 좋게 마무리했다.
오늘도 '수아이' 덕분에 양산을 쓰고 편의점을 가는 나....외국인을 향한 태국인의 친절에 없던 자신감도 뿜뿜 생길 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