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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람쥐 쌤 Mar 31. 2022

삼시세끼 사 먹으면서 살 거야

태국에 취업을 하고 혼자 살게 되면서 나는 스스로 호언장담을 했었다. 


"나는 이제 삼시세끼 다 사 먹고 살 거야. 모든 태국 음식을 다 먹어볼 거라고."


태국의 콘도미니엄은 한국과 같은 주방 시설이 잘 구비되어있지 않은 경우가 많다. 도시가스 대신 전기 인덕션이 매립되어있는 콘도가 대부분이고, 학교 주변의 저렴한 숙소의 경우에는 그마저 없어서 따로 인덕션을 사서 사용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나는 일부러 전기밥솥도 사지 않았고, 당연히 인덕션도 사지 않았다. 다행히 전자레인지가 있어서 여러 가지 인스턴트 음식을 요리하는 데에는 별 문제가 없었다. 

아침엔 과일과 채소 등을 넣은 셰이크를 마시고, 학교 가는 길엔 반찬가게에 들러 점심 도시락으로 먹을 밥과 반찬을 샀다. 학교 카페테리아에서 국수를 먹을 때도 있었고, 11시면 오토바이에 음식 봉지를 주렁주렁 매달고 인문대 건물 앞에 오시는 아주머니께 태국 음식들을 사기도 했다. 나는 태국인 선생님들 사이에서 적응력 만렙 강사로 통했다. 

반찬 가게에서 먹는 점심


"아니 선생님 이것도 드실 줄 아세요?"


나는 사실 비위가 강하지 않은 편이고, 음식에 대해 예민하다면 예민하다고 할 수 있는 사람인데 지난 5년간 해외 생활을 하면서 습득한 포용력 아닌 포용력 같은 것이 있었다. 미국에서 포트럭 파티를 하거나 외국 친구들 집에 초대를 받아 가보면 세계 각 국의 요리를 먹어 볼 기회가 생기곤 했다. 외로운 타국 생활에 친구들은 참으로 고마운 사람들이었기에 설사 입맛에 맞지 않는 음식도 꿀떡꿀떡 삼키고, 맛있다고 칭찬도 하다 보니 길러진 배려심 같은 거였다.


"네. 저 이싼 소시지 좋아해요!"


"우와. 선생님은 태국 사람인가 봐요. 이싼 소시지 안 먹는 사람도 많아요."


게다가 백종원 씨가 진행하는 '스트리트 푸드 파이터'는 나의 최애 프로그램 중 하나였다. 태국을 여행하면서 능숙하게 스트리트 푸드를 집어들며 다양한 지식을 뽐내는 백종원 씨가 멋져 보인 나머지 나는 이미 여러 각 지방의 태국 음식들의 이름과 먹는 방법 등을 미리 예습한 터였다. 


"이싼 사이끄록은 이렇게 매운 고추랑 먹는 거죠!"


태국인 선생님들이 눈이 휘둥그레져서 나의 적응력에 감탄하는 걸 보면서 나 또한 나 자신이 대견했더랬다. 

학교 주변 큰길은 저녁이 되면 온갖 먹을거리를 파는 노점들이 불을 환하게 밝히며 북적거린다. 그리고 화요일과 목요일에는 근처에 큰 야시장도 열려 이국적인 음식 냄새를 풍겼다.


나에게는 저녁 퇴근길에 뭔가 사들고 집에 가기 위해 학교 주변을 두리번거리는 것이 일상이었다. 

작은 밥공기만 한 그릇에 갖가지 토핑이 즐비한 오믈렛 노점을 자주 가곤 했는데, 토핑을 손으로 가리키면 그것들을 섞어 계란 오믈렛을 만들어 밥 위에 얹어 포장해준다. 밥과 계란 오믈렛 봉지를 손에 들고 나면 이제 ABC 치킨 노점으로 향할 차례였다. 우리나라 떡볶이 가게에 갓 튀긴 튀김이 차곡차곡 놓여있는 것처럼 치킨 가게에 가면 여러 가지 맛의 치킨들이 푸짐하고 먹음직스럽게 쌓여있곤 했다. 나는 똠얌꿍 맛의 매콤한 치킨 조각을 서너 개 샀다. 이 정도면 한 끼에 100밧(3500원) 정도의 간단한 식사가 완성되었다. 음식 봉지를 신나게 흔들며 집에 오면 씻기도 전에 테이블 위에 음식 봉지를 잔뜩 열어 놓고, TV를 보면서 게걸스레 먹었다. 강의를 하면 말을 많이 하게 되는데 태국인들의 적은 식사량을 따라가기가 버거워서 저녁이 되면 허기가 극에 달했다.  

태국의 오믈렛 노점
오믈렛에 넣을 여러가지 토핑들

문제는 거의 매일 튀긴 치킨을 먹고 있는 나를 깨닫게 된 것이다. 사실 먹거리가 즐비한 거리에서도 내가 선뜻 선택할만한 음식은 그리 많지 않았다. 태국인들은 생새우, 생 게 그리고 생 연어를 얌이라고 하는 피시소스에 무쳐 먹는 것을 좋아하는데 나는 더운 날씨에 탈이 날 것이 염려가 되어 되도록이면 익힌 음식을 먹으려고 했다. 그리고 대부분 학생들을 상대로 하는 노점들이라 자극적인 맛의 튀긴 음식들이 많았다. 어느 날 채소 요리, 국물 요리, 신선한 나물 무침과 탕 등을 떠올리며 입맛을 다시다가 태국의 유명한 프랜차이즈 음식점인 MK레스토랑에 가게 되었다. 냄비가 테이블마다 놓여있고 여러 채소, 고기, 해산물 토핑을 시켜 샤부샤부처럼 데쳐 국물과 함께 먹을 수 있는 음식점이다. 세트 메뉴를 시켜 채소와 버섯, 고기 그리고 밥을 먹고 나니 조금 채워지는 기분이 들었다.


문제는 매 끼니마다 그렇게 식당에 가기에는 내 월급이 부족하다는 것이었다. 태국 대학교 강사 월급은 사실 굉장히 애매한 액수라 물가가 싸다고 여겨지는 태국이라 할 지라도 한 달이 빠듯하다.


'밥솥을 일단 사고, 인덕션, 냄비, 도마, 칼... 이러다가 주방 살림이 너무 많아지는 거 아니야?'


어느새 주방 살림은 하나 둘 늘어났고, 저녁에 돌아오면 쌀을 씻어 밥솥에 안치고 작은 도마를 꺼내 호박에 두부까지 썰어 넣고 된장찌개를 끓이고 있는 나.


쌀밥에 된장찌개를 후루룩 떠먹다 보니 '사 먹는 음식이 아무리 산해진미여도 김치 한 가지 놓고 먹는 집밥 못 따라간다' 고 하시던 엄마 말씀이 귓가에 울렸다.  

이제 한끼만 사 먹는 걸로 해야겠다..나는 찐 한국인이라는 사실을 또 깨닫는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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