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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쓰리 May 13. 2024

보슬비가 내린 후

보슬비가 그 어려운 걸 해냅니다

시차 때문인지 이른 새벽 눈이 떠졌다. 창밖이 어슴프레 밝아오는 것 같아, 겉옷을 걸치고 현관 밖으로 나갔다.


에어비앤비 숙소는 언덕 꼭대기에 있었다. 방2, 욕실2의 속소는 여러모로 낡은 부분이 많았고, 침대는 뒤척일때마다 삐그덕거렸다. 그러나 낡은 부분들은 유럽의 운치였고, 침대의 삐그덕거림은 낭만적인 소음이었다. 나는 내 생에 가장 관대한 순간을 지나고 있었으니 마음에 들지 않는 부분은 하나도 없었다. 입사 10년만에 첫 일주일 휴가가 막 시작된 참이었다.



현관 밖은 한달전 꿈속에서 보았던 동트는 새벽의 아드리아해였다. 너무 오고 싶어서 꿈까지 꾸었던 곳, 크로아티아 두브로브니크.


한 여름이 아닌 한 겨울에 떠난 휴가였다. 일년 중 가장 비수기인 때라 관광객이 거의 없었다. 상점들은 대부분 문을 닫았다. 쌀쌀하고 스산한 날씨가 이어지는 날들이었으나, 마음에 들지 않는 부분은 하나도 없었다.


엄마는 딸이 먼 곳으로 혼자 여행가는 것을 걱정했다. 앙큼한 내가 잘생긴 연하남과 함께 간다는 사실을 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당시 엄마는 딸 남자친구 생기라고 백일기도를 막 시작한 참이었다.


두브로브니크 올드타운 성곽길을 걷는데 갑자기 보슬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어떡할까 잠시 고민하던 순간, 그가 겉옷을 벗어 우리 머리위로 올렸다. 그의

겉옷을 붙잡고, 둘이 어깨를 꼭 붙이고 성곽길을 내려왔다. 올드타운 골목골목을 거닐면서도 우리는 바로 우산을 사지 않았다. 별 것 아니던 우리 사이가 별 것으로 바뀐 결정적인 순간이다.



귀국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엄마에게 남자친구가 생겼다고 밝혔다. 엄마와 이모들은 난리가 났다. 다들 내색은 안 했으나 10년 가까이 연애도 안 하고 늙어가던 나를 적잖이 걱정하고 있었음을 그제야 알게 됐다. 암튼 이모들은 이걸 엄마의 백일기도 효험이라고 단정하며, 나의 오랜 솔로생활 청산을 크게 기뻐해주었다.


하지만 나의 솔로생활 청산은 누가 뭐래도 두브로브니크의 보슬비가 해낸 것이다. 예고없이 내린 그 보슬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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