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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쓰리 Jun 09. 2024

일본 출장 에피소드 #2 - 나를 살린 ㅇㅇㅇ


객실 구경도 못한 Kimpton 호텔에 당일 취소로 1박 가격을 지불하고, 오쿠라 호텔로 향했다. 오쿠라 호텔로 향하는 차 안에서 나는 이미 반쯤 팽 당한 상태였다. 내일이라도 당장 돌아가시겠다고 비행기표를 알아보라고 하셨으니… 등줄기가 서늘해지고 머릿속은 깜깜해졌다. 도쿄에서의 일정은 전적으로 내게 맡기겠다고 하셨는데, 첫 시작부터 말아먹고 있었으니 오쿠라 호텔로 향하는 10분이 10년 같았다.


호텔로 이동하는 내내 이 생각만 했다. ‘이제 믿을 건 오쿠라 밖에 없다.‘


오쿠라 호텔에 거의 도착했는데, 운전수 와타나베상이 호텔 정문을 못 찾고 우리를 빌딩 측면에 위치한 주차장 입구에 세워줬다. 망할. 이 인간은 왜 계속 이러는 거지? 적진에서 나의 의전 실패를 위해 보낸 스파이인가?


의전의 핵심은 귀빈을 기다리시지 않도록 하는 것에 있다. 나는 차가 서자마자 건물로 뛰어들어갔다. 건물 내부에서 오쿠라 호텔로 이어지는 아케이드를 찾고는 귀빈을 그쪽으로 안내했다. 부티크 아케이드를 지나, 호텔 로비로 연결되는 문이 나왔다. 문을 열고 들어서니 드디어 오쿠라 호텔 로비가 나왔다.


출처: 호텔 홈페잊


로비를 보는 순간 안도했다. 일본식 엘레강스!


오쿠라 호텔 로비는 일본의 여느 5성급 호텔 로비보다 넓고 웅장했다. 2층까지 탁 트인 형태로 된 중앙 로비 한쪽 벽은 일본 전통 쇼지 스크린(우리나라 창호지 문과 비슷)이 채우고 있었다. 로비 분위기는 조명의 역할이 팔할인데, 천정의 조명도 그렇고, 햇빛이 쇼지 스크린을 투과하며 따뜻한 조도와 차분한 분위기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로비 천정은 일본 전통 목조가옥을 모티브로 한 원목 서까래 모양이었는데, 벽면까지 통일감 있게 두껍고 길게 이어져서 웅장한 느낌을 주었다. 로비 바닥은 전체가 카펫으로 되어 있어, 많은 사람들이 오가고 있음에도 시끄러운 발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일본 전통 고급미가 있어서 해외 귀빈을 모시기에 안성맞춤인 호텔이었다!


귀빈께선 단번에 마음을 풀지는 않으셨다. 넓은 로비에 사람들이 많은 것을 보고 “여기 컨퍼런스 같은 거 여는 호텔 아닌가?”라고 혼잣말처럼 말씀하셨는데, 그 말인 즉, 그저 그런 비즈니스호텔 아닌지 의심하시는 말투였다.


나의 진짜 플랜 B는 오쿠라 호텔의 메인 빌딩이 아니라, 별관헤리티지 윙이었다. 헤리티지 윙은 스위트룸급 객실로만 구성된 프라이빗한 별채다. 메인 빌딩에서 직원의 안내를 받아 헤리티지 윙으로 이동해서, 별도로 마련된 로비에서 체크인 수속을 했다. 귀빈 일행분들의 체크인 수속을 마치고 객실키를 전해드리니, 귀빈께서 물으셨다.


“Ms. Lee는 여기에 안 묵어?”

“네, 여기는 만실이라 저는 다른 곳에 묵을 예정입니다.”

“에이, 그러면 안 되지. 객실 남는 거 있는지 물어봐. Ms. Lee도 여기에서 같이 묵어야 해.”

“네, 확인하겠습니다. “


귀빈분들 객실도 운 좋게 겨우 구한 것이니 당연히 추가로 남는 방이 없을 것으로 예상하고, 나는 근처 저렴한 호텔을 찾아 묵을 생각이었다. 하지만 귀빈께서 그리 말씀하시니 거절하는 것도 실례라, 호텔리어에게 남는 방이 있는지 물었는데 이게 웬걸. 마침 객실 하나가 비었다며 빠르게 준비해 주겠다는 것이었다. 뭐야 이 호텔. 서비스가 포시즌스급이네. 덕분에 나는 예정에 없던 오쿠라 스위트룸에 짐을 풀었다.


객실을 확인하신 후 귀빈의 마음이 누그러지시는 것이 보였다. 호텔 All day dining 식당에서 간단히 점심식사를 했는데, 음식 맛이 예상과 달리 훌륭했고, 귀빈께서도 흡족해하셨다. 오케이, 이제 남은 여행의 관건은 식도락에 달렸구나. 여차하면 이 여행을 말아먹을 뻔했으므로, 지금부터 하는 모든 의전에는 실수가 없어야 했다. 뻔하지 않은 코스로 안내하되, 귀빈이 반드시 만족할 수 있는 경험이어야 했다. 자, 이제 만회할 시간이다.


긴자 명품거리에서 쓰메키리를 외치다


식사 후, 오후엔 긴자에 가시겠다고 했다. 긴자라면 보통 루이비통이나 에르메스 매장에 들르시는 것이 보통인데, 귀빈께선 그런 뻔한 코스는 거들떠도 보지 않으셨다. 익숙한 긴자 명품거리를 걸으시다가 갑자기 손톱깎이가 사고 싶다고 하셨다. 네? 손톱깎이요? 응. 15년간 써오던 일제 손톱깎이가 얼마 전에 망가졌거든. 일본이 손톱깎이 잘 만들잖아. 어디 가면 살 수 있지?


세상에. 긴자 명품거리에서 손톱깎이를 찾으시는 분은 처음 보았다. 자자, 당황하지 말고 찾아보자. 우선 바로 앞에 보이는 백화점으로 뛰어들어가, 안내데스크에 물었다. 손톱깎이가 일본어로 생각나지 않아, 손톱 깎는 시늉을 해 보였다. 직원이 찰떡같이 알아듣고 7층으로 가면 된다고 알려주었다. 귀빈을 모시고 7층으로 갔는데, 투박한 디자인의 제품 네댓 점이 있을 뿐이었다. 아이고, 이건 땡 탈락.


이번엔 바로 옆 마츠야 긴자 백화점으로 갔으나, 여기도 비슷한 제품만 있어서 또 땡 탈락. 마지막이라는 심정으로 미츠코시 5층 맨즈 코너로 모시고 갔다. 이게 웬걸? 남성복 파는 매장 옆 남성복 잡화 매장의 눈높이 매대에 부티나는 세련된 모양새의 손톱깎이 서너 개가 조르륵 진열되어 있었다. 이거다! 주머니나 지갑에 넣고 다녀도 될 만큼 작고 납작한 모양의 손톱깎이들이 있었다. 하나같이 절삭력이 예술이었다! 귀빈께서도 제품이 마음에 쏙 드셨는지, 지인분들 선물용까지 스무 개 넘게 구매하셨다. 휴. 다행이다.


식도락을 즐기는 미식가


쇼핑 후 저녁식사는 호텔 일식당의 스시 카운터로 예약했다. 일요일인 데다 연휴라서 프라이빗 룸은 이미 예약이 다 찼고, 스시 카운터 테이블이 예약 가능한 최선이었다. 메뉴는 미리 제일 비싼 코스로 주문해 두었다.


쇼핑에서 돌아오신 후, 일식당으로 안내했다. 사시미에 따뜻한 사케인 아츠캉을 곁들이는 걸 좋아하시는 분이라 사케도 주문했다. 메뉴판에서 제일 비싼 것으로 주문했는데, 180ml 한 병에 20만원 정도 하는 것이었다.


일본인 셰프가 눈앞에서 예술적인 손놀림으로 회를 썰어 각자 앞접시에 두세 점씩 놓아주었다. 셰프의 손놀림이 화가가 붓질을 하듯 거침없으면서도 섬세하고 유려했다. 기모노를 입은 서버분이 아츠캉을 작고 예쁜 도자기 호리병에 담아, 각 자리 앞에 놓아주었다. 귀빈께서 기분 좋게 건배를 제안하시고, 일본식 쫄깃한 숙성회에 곁들여 따뜻한 사케를 한 모금했다. 와우. 비싼 술은 맛이 아니라 향으로 먹는다더니, 이 사케가 딱 그러했다. 목으로 넘어가는 순간 향기로운 피니쉬가 예술이었다. 귀빈께서도 눈이 휘둥그레지셔서 나를 바라보시며 엄지를 척 들어 올리며 말씀하셨다. Ms. Lee, 아주 잘 골랐네!


오쿠라 호텔에는 소담하고 예쁜 정원도 있어서, 식사가 끝날 즈음 귀빈께 밤산책을 제안드렸다. 오후에 살짝 내렸던 비가 그치고, 선들한 바람이 산책하기에 더없이 기분 좋게 부는 밤이었다. 호텔 로비 앞 쪽에 넓은 원형 형태의 수변공간이 있고, 그 가운데 아주 오래되어 보이는 큰 버드나무가 있었다. 귀빈께선 호텔 정원과 그 수변 둘레길을 걸으시며, 내게 물으셨다.


Ms. Lee, 이 호텔은 어떻게 찾았어?

“이곳은 도쿄에 있는 일본 전통적인 고급 호텔 3대장 중 하나라고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 나는 처음 와보는 곳인데, 크고 전통 있는 좋은 호텔이네. 아주 훌륭해.”


나는 대답 대신 미소를 지었다. 휴. 살았다. 팽 당하지 않고 살아남았어.



비 오던 날의 신주쿠 교엔


도쿄 둘째 날 아침이 밝았다. 일본의 일기예보는 틀리는 법이 없다. 비 예고는 현실이 되었다. 청명한 가을하늘을 기대했지만, 창밖엔 추적추적 가을비가 내리고 있었다. 하아… 귀빈들은 쇼핑엔 별 관심 없는 분들이었다. 그럼 이 비 내리는 날 어디를 모시고 가야 좋단 말인가.


고민 끝에 신주쿠 교엔을 모시고 가기로 정했다. 찾아보니 ‘교엔(Gyoen, 御苑)’은 원래 황실 소유지였던 곳을 부르는 말이고, ‘코우엔(Kouen, 公園)’은 황실과 역사적 연관성이 없는 일반 대중이 이용할 수 있는 공원을 의미했다. 귀빈을 모시고 가기엔 일본식 정원의 아름다움이 짙게 묻어날 교엔이 적합했다. 입장료를 내고 들어가야 하는 데다, 오늘은 비까지 내리고 있으니 사람도 적을 것 같았다. 비 오는 날의 야외산책! 그래, 오늘은 신주쿠 교엔이다.


사실 나도 신주쿠 교엔은 처음이었으나, 구글맵을 질리게 봐둔 덕에 어디서 표를 사야 하는지, 어느 루트로 산책을 해야 하는지 머릿속에 그림을 그릴 지경이었다. 호텔에서 미리 장우산을 빌려 차에 실어두었다. 비는 전혀 그칠 기미가 보이지 않았으나, 바람이라도 조금 잦아들어 다행이었다. 미리 준비한 장우산을 하나씩 나눠드렸다. 나는 빠른 걸음으로 앞서 가서 먼저 입장권을 구매했다.


정문을 지나 조금 걸으니 타마모 연못이 나왔다. 비 오는 날 황실정원 연못을 거니는 것은 꽤 운치 있는 일이었다. 귀빈분들께선 연못에서부터 사진을 찍기 시작하셨다. 내가 사진을 찍어드리겠다고 말씀드리고, 귀빈분들의 아이폰을 받아 들었다.


아이폰 기본모드로 찰칵, 인물모드로 상반신 찰칵, 자연스럽게 웃으시는 순간들을 찰칵 찰칵. 몇 번 그렇게 찍어드리니, 이제 아예 나보고 당신 아이폰을 들고 있으라고 하셨다. 나는 열정적인 스냅사진 작가가 된 심정으로 열과 성의를 다해 사진을 찍었다. 서로 대화 나누실 때 기분 좋게 웃으시는 모습을 찍었다. 그중 몇 개는 인생샷이라 할 만큼 잘 나온 것 같았다.


신주쿠 교엔에는 오래된 나무들이 많았다. 일본의 나무껍질은 대체적으로 한국보다 더 어둡고 검은색을 띤다. 소나무만 하더라도 ‘구로마쓰’라는 흑송을 주로 식재해서 멀리서 보면 묵직한 무게감이 느껴진다. 황실 정원이어서 그런지 일본의 차분함과 고즈넉함이 묻어났다. 귀빈께선 또 내게 물으셨다.


Ms. Lee, 여기는 또 어떻게 찾았어?

“원래 왕실 소유였는데, 이제는 대중에게 개방된 공원이라고 들었습니다. 저도 와보는 것은 오늘이 처음입니다.”

“그래? 여기 너무 아름답네. 훌륭한 선택이야.”


휴, 신주쿠 교엔이 또 나를 살렸네.


그렇게 망할 뻔했던 일본 의전출장은 오쿠라 호텔과 신주쿠 교엔, 그리고 그 외 일일이 열거하기엔 너무 많은 에피소드들이 나를 살렸다. 귀국하던 날, 귀빈들의 경유지 싱가포르까지 함께 날아가서 배웅해 드렸다. 싱가포르 공항에 도착해서 보스에게 전화를 드려서 싱가포르까지 잘 모시고 왔음을 말씀드리고, 귀빈과 통화하실 수 있도록 연결해 드렸다.


귀빈께서 말씀하시길,

“아, 이번에 Ms. Lee가 너무 잘 챙겨줘서, 완벽한 여행이었어. 우리 모두 아주 만족했어. Ms. Lee 진급시켜, 진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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