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증명하는 일, 영역 밖의 라이벌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것 중 하나는 야구다. 물론 한동안 야구장은 가뭄에 콩 나듯 방문했고, 지금의 나에게 프로야구는 종종 중계나 기록을 챙겨보며 응원하는 정도다. 코로나 19가 끝나면 때때로 예전 추억을 떠올리며 야구장을 찾고 싶어 하는 흔한 야구팬 중 한 명이다.
한때 프로야구는 내 일상의 거의 전부였다. 홈경기 일정에 맞춰서 약속을 조정하는 건 흔한 일이었다. 포스트 시즌이면 언제 바뀔지 모르는 스케줄 때문에 개인적인 일정은 모두 비우고 기다렸다. 내 생일이 포스트 시즌 가운데였지만 매년 돌아오는 생일보다는 하루하루가 다른 그 생생한 경기가 더 중요했다. 주말 원정 경기를 위해 밤샘 근무 이후에 바로 고속버스에 오르기도 했다. 그렇게 주말을 야구장에서 보내도 지치지 않을 만큼 일상의 에너지였다. 다소 늦게 떠난 나의 첫 해외여행도 야구 경기를 위한 원정이었으니 그때의 나에게 야구는 뺄 수 없는 요소였다.
지금은 SSG랜더스, 하지만 나에게는 SK 와이번스로 더 익숙한 인천 연고의 팀을 응원한다. 처음 회사에 입사했을 때부터 지금까지 내가 프로야구를 좋아한다고 말하면 많은 사람들이 왜 이 팀을 응원하는지 물었다. 쉽게 주위에서 찾아볼 수 있는 인기팀이 아니어서일까. '왜'라는 질문에 섞인 의아함이 처음에는 불편했지만 이내 익숙해졌다. 잠시지만 인천에 산 적이 있고, 태어나서 처음 야구장에 간 것이 문학구장이었다고 답하면 대체로 고개를 끄덕인다. 듣고 싶지도, 논쟁하고 싶지도 않은 주관적인 편견을 이야기하는 사람도 있지만 대화의 주제를 바꾸면 그만이다.
사실은 인천에 살았던 것이나 그 경기장이 나의 첫 야구장이라는 건 내가 이 팀을 응원하게 된 이유로 크게 중요하지 않았다. 내가 SK 와이번스를 응원하게 된 건 풀어놓자면 긴 이야기가 있다. 다만 굳이 설명하고 싶지 않았다. 아마 이 이야기를 내게서 이미 들은 사람이라면 나와 오랜 시간 야구 이야기를 함께 할 만큼 야구팬일 테다. 아니면 내가 기분 좋게 취했을 때를 함께했거나.
어릴 때 우리 집에는 아빠가 회사에서 받아온 어린이 야구용품이 있었다. 삼성 라이온즈. 지금 떠올려보면 에버랜드(당시 자연농원) 마스코트처럼 생긴 사자가 그려져 있었다. 갈기가 인상적인 수사자가 있는 야구공과 글러브. 야구에 대해서는 발야구 외엔 룰도 제대로 모르면서 삼성 라이온즈가 우리 편이라고 생각했다. 한 학년이 고작 25명 남짓한 시골 학교에서 야구를 하긴 어려웠다. 그 글러브와 야구공은 언젠가 바자회에 내고 그대로 잊혔다. 야구에 대해 짧게나마 알게 된 건 고등학생 때였다.
고등학교 2학년 때 체육시간에는 1년 내내 소프트볼을 했다. 특정 종목으로 한 해를 채우는 게 흔한 경험은 아닐 것 같은데, 팀을 짜서 연습을 하고 실제 경기를 하는 것으로 수행평가 점수를 받았다. 1학년 때와 달리 이때는 체육시간을 꽤 기다렸다. 수능성적이 최우선인 고등학교 교과 과정에서 체육시간은 굉장히 뜸했는데, 몇몇 친구들과는 주말에도 학교 글러브나 배트로 연습을 하곤 했다. 경기에서 이겨야 좋은 점수를 받을 수 있다는 핑계가 있었지만, 사실 그냥 재밌어서 했다. 소프트볼 규칙을 찾다 보면 야구 규칙이 자연스럽게 따라붙기에 야구 경기는 제대로 본 적도 없었지만 그냥 익숙해졌다. 그즈음에는 김병현 선수가 메이저리그에서 뛰고 있었다. 가끔 주말에 TV 중계를 보며 손에 땀을 쥐었다. 그럼에도 국내 프로야구에는 아는 바가 없었다. 추억 속 삼성 라이온즈 정도.
그도 그럴 것이, 2002년에 고등학생이 된 내 또래에게 당시 최고의 스포츠는 축구였다. 학교 강당에서 전교생이 '대한민국'을 외치며 뛰었던 한일월드컵 세대였으니까. 1년 만에 많이 시들해지긴 했지만, 2002년에는 친구들과 모여서 K리그 올스타전을 볼 정도였다. 프로야구를 이야기하는 친구는 없었다. 아니, 있었을지도 모르지만 내 관심이 닿지 않았다.
대학 입학 후에 야구를 다시 만나게 된 건 사소한 우연이었다. 그때 난 인천에 살고 있었는데, 고등학생이던 동생이 학교 숙제로 보게 된 연극에서 야구티켓을 선물로 받아왔다. 전혀 관심 없던 동생이 표를 줬고, 매번 익숙한 영화관 데이트 대신 새로운 시도로 당시 남자 친구와 가게 됐다. 인천을 연고지로 하는 구단이 있다는 사실도, 인천이 야구에서는 많은 사연을 품은 도시라는 것도 몰랐다. 상대팀과 일정이 이미 결정되어있는 두 장의 티켓에는 추억 속의 이름이 있었다. '삼성 라이온즈'와 'SK 와이번스'의 토요일 경기였다. 사자는 알겠는데 와이번은 뭐냐며 검색해봤던 기억이 난다. (Wyvern은 비룡인데, 나는 아직도 랜더스의 마스코트보다는 비룡이 친숙하다....)
인천지하철 1호선, 문학경기장 역에 내려서 거대한 구장에 다다를 때까지도 나는 어떤 팀을 응원할지 결정하지 못했다. 왠지 잊고 지냈던 추억 속 상자에서 튀어나온 그 사자를 외면하지 말아야 할 것 같았다. '좋아하는 색으로 결정하자!'고 했지만 공교롭게도 양 팀 모두 파란색이었다. (지금은 SK 와이번스를 붉은색으로 기억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내가 처음 야구장에 갔던 해에는 파란색이었다) 야구장에 가까워지면서 점점 크게 울리는 응원가와 길 옆으로 펄럭이는 푸른 깃발에 마음도 흔들렸다. 야구에 큰 관심은 없었지만 어디서 듣고 왔는지 '응원은 홈 팀이 재밌다더라'는 남자 친구의 말에 난 결국 1루, 홈 팀인 와이번스의 응원석 쪽으로 항했다.
그 경기는 볼거리가 많았다. 0대 0으로 팽팽하게 유지되던 균형을 깬 첫 점수는 타격이 아니었는데, 박재홍 선수의 단독 홈스틸이었다. 야구를 좀 더 잘 알게 된 이후에는 홈스틸이 얼마나 희귀한 장면인지 알지만 당시에 야구장에서 느끼기에는 '우다다', '휙', '와아아' 하는 느낌으로 정신없이 갑자기 득점이 이루어졌다. 스마트폰도 없었던 시기라 무슨 일인지 바로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그래도 좋았다. 기분 좋게 앞서는 경기를 즐기다가 8회에 상대의 역전 홈런이 나왔다. 계속 리드하다가 끝나기 조금 전 뒤집어진 점수에 응원석 분위기도 금방 가라앉았다.
그렇게 마지막 공격인 9회 말, 경기 내내 관심 있게 보던 선수가 타석에 들어섰다. 고졸 신인인 선수였는데, 첫 타석에서 전광판의 선수 소개를 보다가 빠른 87년생이라 나와 동갑내기라는 생각에 눈여겨보게 됐다. 대학 새내기로 정신없는 첫 학기를 보내고 두 번째 개강을 며칠 앞두고도 어리바리했던 나와 달리, 프로 무대에서 까마득한 선배들과 함께 라인업에 올라있다는 게 신기했다. 괜히 다른 베테랑 선수들보다 더 잘했으면 하는 마음으로 더 큰 목소리로 응원했었다. 야구는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라고 하지만, 너무 결정적인 순간에 신인에게 찾아온 기회에 나도 덩달아 긴장했다.
아직 여름이라 경기가 끝난 후에도 어슴푸레한 하늘빛이 보였다. 다시 지하철역으로 돌아가는 길에 고개를 돌려 조명탑이 꺼지지 않은 야구장을 바라봤다. 긴장하며 떨렸던 심장박동이 그대로 빠르게 뛰는 것 같았다. 다시, 또다시, 여러 차례 이곳에 오게 될 것 같았다. 또 오자고 약속하진 않았지만 그런 기분이었다. 직접 공을 던지거나 내가 타격을 하지 않아도 함께 긴장하고 기쁨을 나눌 수 있는 곳. 영화관에서 이미 정해진 결말을 보고 듣는 것과 다르게, 야구장에는 지금 이 순간에 만들어내는 생생한 결말이 있었다. 그러니까, 결국 돌아갈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 우연히 응원한 팀에 푹 빠져들 수밖에 없었다. 서로 다른 사람들과 함께, 가끔은 혼자서도 야구장을 방문하게 됐다.
결국 그날의 경기는 어떻게 되었을까? 물론 승리했다. 경기 내내 더 큰 목소리로 응원했던 고졸 신인은 기어이 9회 말 자신의 타석에서 끝내기 안타로 팀에게 승리를 안겨줬다. 상대 투수는 임창용이었다. 전년도 구원왕이었던 임창용에 대해 그날에도 알았다면 나는 더 긴장했거나 기대를 버렸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야구는, 스포츠는 아무도 모른다. 대학 신입생인 나와 또래라 더 마음을 쏟았던 그 고졸 신인은 국가대표 3루수가 됐다. 2021년인 올해를 포함해 벌써 7번째 골든글러브를 받았다. 올해에는 리그 홈런왕이 되면서 세 번째 홈런왕 타이틀도 챙겼다.
스무 살이던 그 해에도 나를 자극했고, 13년 차 데이터 분석가이자 리더로 새로 출발한 올해에도 나에게 좋은 목표가 된다. 마음속의 라이벌이라고 하면 누군가는 비웃을 지 모르겠지만, 그만큼 제 영역에서 빛나고 싶다는 마음으로 나의 롤 모델이기도 하다. 프로야구와 달리 내 직무에서 골든글러브 같은 상은 없지만, 각본이 정해져 있지 않다는 사실만은 같으니까. 팀의 막내였던 그때나 베테랑이 된 지금이나 그는 제 자리에서 제 역할을 하고 있다. 운동선수로 적지 않은 나이지만, 대신 경험과 노하우가 있다. 무엇보다 에이징 커브(어느 정도의 나이가 되었을 때 운동능력이 저하되면서 기량이 떨어지는 현상에 대해 말한다)를 의심할 수 없도록 스스로를 증명하고 있다. 내 역할을 하고, 그렇게 나를 증명하자는 자극을 이번 골든글러브 수상 소식으로부터 다시 한번 받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