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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샛별 Feb 20. 2022

부정한 날개를 단 경쟁

다큐멘터리 영화 <이카로스>를 보고


그리스 신화 속 이카로스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이카로스(Icarus)는 다이달로스(Daedalus)의 아들이다. 대장장이 신 헤파이스토스의 자손인 다이달로스는 최고의 건축가이자 발명가였다고 한다. 다이달로스의 뛰어난 능력은 그가 건축한 미궁을 통해 알 수 있는데, 반인반수의 괴물 미노타우로스가 갇혔던 미궁이 바로 그가 설계한 라비린토스다. 다이달로스는 그 이후 다른 이유로 왕의 노여움을 사서 자신이 설계한 미궁에 아들 이카로스와 함께 갇힌다. 최고의 건축가인 자신이 설계한, 들어갈 수는 있지만 절대 나올 수 없는 미궁에 빠진 것이다.

    자연의 법칙을 거슬러 하늘을 날고자 했던 이카로스의 이야기가 바로 여기서 시작된다. 다이달로스와 이카로스는 미궁을 탈출하기 위해 인간의 한계를 넘어 하늘을 날기로 결심한다. 뛰어난 발명가이기도 했던 다이달로스는 새의 깃털을 모아 실과 밀랍으로 이어 붙여 날개의 형상을 만든다. 자신과 함께 날아야 할 아들 이카로스에게도 자신이 만든 날개를 달아준 다이달로스는 비행을 앞두고 이카로스에게 단단히 경고한다. 

“너무 높이 날면 태양의 열기에 밀랍이 녹아버릴 것이고, 너무 낮게 날면 바닷물에 젖어 무거워진다. 반드시 바다와 하늘 가운데를 날아야 한다”라고. 모든 옛이야기에서 그렇듯 이런 충고 뒤에는 반드시 비극적 결말이 따른다.

    다이달로스와 이카로스는 새처럼 날아올라 미궁을 탈출한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하늘을 날던 이카로스는 아버지의 충고를 잊고 태양 가까이 날아오르다가 밀랍이 녹아 추락하고 만다. 그는 바다에 빠져 목숨을 잃었다. 바라던 대로 미궁은 탈출했으나 잘못된 선택과 결정으로 결국 삶을 마감한 셈이다. 이카로스가 빠진 그 바다는 그의 이름을 따서 '이카리아 해'로 불린다고 한다. 




땅을 질주하는 어제의 이카로스


    신화 속 인물과 동명의 다큐멘터리 영화 <이카로스>의 시선은 그가 날던 하늘이 아니라 땅에서 시작한다. 영화에서 카메라 렌즈는 랜스 암스트롱의 인터뷰를 비춘다. 랜스 암스트롱은 최고의 사이클 대회인 투르 드 프랑스(Tour de France)에서 사상 최초로 7연패를 달성했고, 암을 극복하기도 했던 신화적 인물이다. 이 영화의 감독이자 아마추어 사이클 선수이기도 한 브라이언 포겔에게 그는 영웅이었다. 그 사건 전까지는. 랜스 암스트롱은 약물을 복용해 경기력을 향상했던 사실이 밝혀지며 선수 시절에 기록한 화려한 경력을 박탈당했다. 더 놀라운 것은 그가 선수로 뛰는 동안 500회가 넘는 도핑 테스트를 실시했음에도 늘 음성이었다는 사실이었다.

    감독 브라이언 포겔은 그 사실에 충격을 받았다. 그래서 자신이 직접 실험체가 되어 도핑 테스트의 허점을 밝히고자 했다. 경기력 향상에 도움을 주는 약물을 스스로 투약하고 아마추어 사이클 대회에 참가해 약물 복용 후에도 도핑 테스트를 피할 수 있음을 보여주려고 했던 것이다. 그 과정에서 정교한 프로그램으로 자신을 도와줄 인물을 만나게 된다. 그가 바로 한때 전 세계를 충격에 빠지게 했던 인물, 모스크바 반도핑 연구소 소장이었던 ‘그리고리 로드첸코프’다.

    스포일러가 될 수 있으므로 구체적인 내용을 모두 언급하지는 않겠지만, 영화는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뉜다. 약물을 주사하며 경기력을 향상하는 자신의 모습을 기록해가다가 큰 전환점이 되는 것이 바로 러시아가 스포츠 선수들이 약물을 복용해 경기력을 향상하는 조직적 시도를 했다고 밝혀지는 사건이다. 감독이 도핑 테스트를 피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손 잡았던 '그레고리'가 그 조직적 시도에 관여했던 인물이다. 



범죄와 혁명을 함께 담아낸 영화


    넷플릭스에서는 이 영화를 다음과 같이 짤막하게 소개한다.

스포츠와 약물의 추악한 관계를 파헤친 브라이언 포겔 감독의 다큐멘터리.
아카데미 최우수 장편 다큐멘터리 부문을 수상했고, 선댄스 영화제 첫 번째 오웰상을 받았다. 

    선댄스 영화제의 오웰상에 대해 찾아봤지만 의미 있는 정보를 얻을 수 없었다. 다만, 문학으로 눈을 돌려보면 1994년부터 영국에서 수여되고 있는 오웰상(The Orwell Prize)이 있는데 비슷한 의미의 상이 아니었을까 추정해볼 뿐이다. 영국의 오웰상은 ‘정치적 글쓰기를 예술로 승화한다’는 조지 오웰의 말을 슬로건으로 1994년부터 영국 내 뛰어난 정치 저작물을 선별해 상을 수여해왔다고 한다. 


    <이카로스>의 첫 장면에서는 작가 조지 오웰이 했던 말이 문자로 소개된다.

"During times of universal deceit, telling the truth becomes a revolutionary act.
거짓이 판치는 시대에는 진실을 알리는 게 혁명이다." 

    사실 이 다큐멘터리가 처음 시도하려던 것은 혁명은 아니었을 것이다. 시작에서는 많은 이들은 눈치채지 못했고, 누군가는 교묘히 이용하고 있는 허점을 보여주려는 작은 실험 같아 보였다. 감독에게는 행운이었을지도 모르고 이를 잘 이용해왔던 거대한 시스템과 그레고리에겐 예상치 못한 불운일 묘한 일들이 일어나면서 카메라의 렌즈는 다른 곳을 향한다. 거짓으로 숨겨진 진실을 알리는 것. 사소해 보이지만 위대한 변화를 이끌어 낼 수도 있는 혁명. 




영화 <이카로스>가 끝나고


    2시간의 다큐멘터리가 끝나고 나서 감상을 짧게 요약하면, 한 편의 문학작품을 읽은 것 같았다. 현실의 비춘 다큐멘터리 같은 느낌보다는 인간이 가진 상상력의 위대함을 보여주는 작품처럼 허상으로 느껴져서다. 영화 중간에 계속 언급되고 실제로 일부 구성에 차용되기도 하는 조지 오웰의 <1984>를 얼마 전 다시 읽어서 더 그랬을까. <1984>에서 묘사하는 음울한 분위기와 내 심장이 조여왔던 긴장감이 그레고리의 불안한 표정과 행동에서 그대로 느껴졌다. 주인공의 어떤 노력으로도 벗어날 수 없는 <1984>의 시스템은 개인의 무력함을 인정하고 두려워하는 그레고리의 모습과 많이 닮았다. 

    하지만 러시아에서는 책을 쓰는 게 위험하다고 말했던 그레고리가 영화 후반부에 앞으로의 계획에 대한 질문에 '책을 써볼까'라고 답한 것이 인상 깊었다. 어쩌면 우리 현실의 결말은 <1984>와는 달라질 수도 있을 거라고 희망을 갖게 했다. 세상을 속이는 거짓의 편에 함께였지만 진실을 밝히기를 선택한 그레고리. 영화가 끝날 때쯤 마치 상상처럼 해변을 개와 함께 달리는 그의 자유로운 몸짓과 장면이 조금은 아쉬운 현실에서의 결과와 대조된다.

    

    많은 사람들이 <이카로스>를 소개할 때, 이 일련의 사건이 실제인지 검색해보고 싶어지는 영화라고 한다. 이 영화를 허구로 쓰인 문학작품처럼 느꼈던 내 감상도 그와 같다. 거짓말 같고, 어쩌면 거짓이었으면 하는 마음까지 드는 불편한 진실이다. 수년 전부터 올림픽에 러시아가 국가로 참여하지 못하고 '러시아 올림픽 위원회'라는 이름으로 올림픽 마크 아래 참여한다는 점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 아래에 상상 이상으로 엄청난 음모와 시도, 결과들이 있었음은 잘 몰랐다. 거대하고 묵직한 진실 앞에서 처음 화면에 새겼던 조지 오웰의 말을 다시 떠올렸다. "거짓이 판치는 시대에는 진실을 알리는 게 혁명이다."




이카로스의 추락


    그리스 신화에서 이카로스는 날개를 잃고 바다에 빠져 죽는다. 인간인 그에게는 주어지지 않았던, 처음부터 끝까지 그의 것일 수 없었던 날개다. 자신이 가진 것으로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는 사람들은 박수를 받아 마땅하다. 스포츠든 다른 영역이든 마찬가지다. 이카로스는 원래 자신의 것이 아닌 날개를 달고 하늘을 날았다. 미궁을 탈출하기 위해 단 날개로 태양까지 욕심을 내어 다가가다가 죽음을 맞은 곳이 바다여서 다행이었다는 생각도 든다. 바다와 하늘 사이, 원래 자신의 영역에서 자신의 일을 하고 있었던 선량한 보통의 영웅들에게 피해를 끼치지는 않아서다.

    미궁을 벗어나기 위한 방법이 달리 없었다는 핑계가 신화 속 이카로스와 다이달로스에게는 있었다. 하지만 지금 교묘하게 위장한 날개를 숨기는 이들에게는 어떤 노력으로도 빠져나갈 수 없는 미궁 같은 건 없다. 누구도 가두지 않은 미궁에 스스로 빠져서 부정한 날개 외에는 아무 방법이 없다고 생각하는 자신의 그릇된 믿음이 어쩌면 세상에서 가장 빠져나오기 어려운 마음속의 미궁 인지도 모른다.



2022 동계 올림픽


    2022년 동계 올림픽이 오늘 폐막했다. 올림픽 중반부터 피겨 스케이팅 종목에서 불거진 도핑 논란으로 전 지구적 스포츠 축제가 얼룩졌다. 스포츠에서 일어나는 도핑이나 판정 논란에 많은 사람들이 함께 분노하는 이유는 우리에게 스포츠가 주는 의미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우리가 일상에서 경험하는 정말 많은 일들 사이에서도 모두가 합의한 규칙과 공정한 경쟁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믿기 때문이 아닐까. 가장 이해하기 쉽고 명확하게 경쟁의 규칙이 정해진 무대, 그 공정한 잣대가 우리가 경험하는 세상의 어떤 일들보다 잘 지켜지는 것이 스포츠라고 믿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지금의 올림픽은 고대 그리스의 올림피아 제전에서 영감을 얻어 시작됐다. 이카로스가 추락했다고 알려진 그리스 남부의 바다를 상상해본다. 신화 속에서 이카로스는 홀로 바다에 추락했다. 하지만 오늘의 이카로스들에게 혼자 추락할 수 있는 방법 같은 건 없다. 오늘 우리 현실 속 부정한 날개를 단 이카로스들은 각자 최선의 방법으로 하늘과 바다 사이에 머무르는 이들에게 불을 옮긴다. 자신의 것이 아닌 부정한 날개를 단 경쟁에 더 냉혹한 경계가 필요한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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