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동기 중 한 명은 학창 시절 수업시간에 배워온 위대한 역사적 유물을 두루 둘러보겠노라며 항상 유럽 여행에 대한 꿈을 간직해 왔다. 그러나 대학교를 다닐 때는 물론 졸업을 하고 30살이 넘을 때까지 해외여행을 단 한 번도 가지 않았다. 내 기준엔 못 간 게 아니라 가지 않은 것이다. 물론 그녀 나름의 이유는 있었다. 학생 때는 공부해야 하고 돈이 없어서, 졸업 후에는 임용고시를 준비해야 하고 돈이 없어서, 취직 후에는 시간이 없어서. 그리고 다니던 직장에서 지금의 남편을 만나 결혼을 했다.
우리가 알아온 세월 내내 신혼여행은 기필코 유럽으로 가리라 했던 그녀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전 세계적 팬데믹 기간에 결혼을 한, 일명 코로나 시대의 피해자다. 결국 신혼여행지는 제주도였다. 지금은 임신을 하고 아이를 낳고 키우며 직장생활을 이어가고 있다. 여전히 그녀는 돈도 시간도 부족하다. 그렇게 그녀의 로망이었던 유럽 문화유산 투어는 점점 더 멀어져 가고 있다.
주변의 또래 친구들을 보면 사회생활을 시작한 순간부터 적금을 들고 돈을 모았다. 목적은 결혼자금이다. 후배들을 보면 노는 게 더 좋을 한창때의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본인에게 투자하기보단 돈을 모았다. 목적은 모른다. 선배들은 너도 결혼하려면 이젠 돈을 모아야지라며 나에게 조언을 해주곤 했다. 그럼에도 나는 일 년에 한 번씩 꼬박 떠나던 9박 10일의 휴가에 아낌없이 썼다. 말 그대로 일 년 벌어 일 년 쓰는 삶이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더 나의 선택이 옳았음을 확신한다. 여행은 여윳돈을 모아서, 시간이 많아서 가는 것이 아니라 두 다리가 튼튼할 때 가는 것임을 말이다.
젊을 때 많이 다녀보라던 어른들의 말씀은 겪고 보니 틀린 게 하나 없다. 일단 파리의 ‘노트르담 대성당’, 바티칸 시국의 ‘성 베드로 대성당’, 피렌체 두오모 ‘산타 마리아 델 피오레 대성당’의 큐폴라 Cupola 를 오르기 위해서는 일단 길고 긴 줄을 서야 한다. 그다음 좁고 가파른 계단을 뱅글뱅글 돌아가며 한참을 올라야 하는 것이다. 그 과정은 거칠고 힘들며 결코 아름답지 않다. 하지만 이 길 끝에 나타날 멋진 광경에 대한 기대 하나로 헉헉대며 오른다.
심지어 하와이의 아름다운 바다 전경을 보려면 다이아몬드 헤드를 하이킹해야 하고, 유명한 맛집 앞 1~2시간 대기는 기본이며, 이 골목에서 저 골목을 넘나들며 여기저기 둘러보기 위해서라도 튼튼한 두 다리는 필수이다. 그렇다 보니 20대의 여행과 60대의 여행은 같을 수가 없다. 보고 듣고 먹고 즐기는 것이 달라지는 것은 물론 선택의 폭이 좁아지는 것이다. 이쯤 되면 여행의 조건은 돈도 시간도 아닌, 젊고 건강한 몸과 마음이라 하겠다. 육체적인 젊음은 물론 정신적인 젊음과 여유가 절실하다.
사람은 몸보다 마음이 먼저 늙는다는 말이 있다. 시간의 흐름을 잡을 순 없지만 나이가 들어가는 것과 늙는 것은 엄연히 다르다. 꿈을 꾸고 이루고자 하는 의지와 열정이 있는 한 늙기엔 아직 젊으며, 마찬가지로 여행에도 적당한 때란 없을 것이다. 다만, 너무 늦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다리가 떨리면 큰일이니깐.
“친구야, 아직 늦지 않았어!”
One's destination is never a place, but a new way of seeing things.
- by John Steinbec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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