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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uie Coree Jan 11. 2021

사랑으로 쉬는 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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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숨들이 당연하고 자연스럽게 쉬어질 수 있도록 놔 두기를. 무엇이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것이며 왜 그런지는 알아도 좋지만, 신경 쓰지 않아도 되고 독선으로 판단할 바도 아니다. '스스로自 그러함然'이 자연이니까. 


  제목의 배경 사진 속 데이지들은 어떤 사람 눈에는 다 똑같아 보일 수도 있고 또 어떤 이의 눈에는 다 달라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누가 뭐라든 저 꽃들은 그냥 저 꽃들이다. '데이지다움'에 얽매일 필요조차 없다. '자신다움'은 이미 거기에 있으며, 모든 생명은 존재함으로써 이미 고유하기 때문이다. 그냥 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조건. 살아 숨쉰다는 것은 그토록 경이로운 일이다. 데이지다운 게 무언지 고민하며 자아 찾기를 해보는 것도 좋지만, 장미를 닮은 데이지가 태어나면 안 된다는 법도 없고, 어느 날부턴가 옆에 핀 양지꽃이 괜히 부러워 양지꽃을 따라 피고 지기를 원한 데이지가 있다고 해서 무조건 자존감이 낮은 거라고 평할 자격이 있는 사람도 없다. 그런 삶을 살았다고 해서 언제까지는 데이지다웠고 언제부터는 데이지답지 않았다든가 하는 생각으로 자신이나 타자를 괴롭힐 필요도 없다. 데이지나 양지로서 살았던 삶을 굳이 부정할 필요도 없고, 데이지로 살거나 살지 못했다고 해서 숨의 주체가 달라지는 것도 아니다. 그저 그 모든 걸 합친 게 그이자 그의 삶이며, 그 자신 외에는 그 숨을 온전히 쉴 수 없으므로 그 자체로 유일하다. 

  하지만 누군가 그에게 억지로 남다른 특별한 꽃이 되라거나, 관습적으로 데이지스러운 삶만을 생각해야 한다며 불필요한 자극을 자꾸 준다면, 그건 오만한 폭력이 된다는 것쯤은 알 필요가 있다. 내 심장을 통해 그 심장의 숨결을 그대로 느낄 수 없다면, 최소한 알고는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세상의 판단만으로 자기 인생의 잣대를 지으면 모처럼 받은 자유로운 삶을 사육당하는 게 되고(그걸 선호한다면 괜찮겠지만), 자기 잣대나 세상의 평가만으로 다른 삶을 함부로 가치 매긴다면 남도 사육장에 가두겠다는 것밖에 되지 않는다. 삶은 합의된 기준에 따라 품질 관리를 해야 하는 상품이 아니다. 나는 그저, 저 알아서 쉬어지는 숨이 나에게 있듯 꽃에게도 그런 숨이 있고, 새에게도 그런 숨이 있으며, 당신에게도 그런 숨이 있다는 것만 안다. 왜 그런 것인지는 모르나, 소중한 숨이 하나씩만 있음을, 안다. 


  나의 숨이, 누군가의 숨이, 서로 당연하고 자연스럽게 쉬어지도록 할 때, 쉼을 느낀다. 그렇게 함께 숨을 자연스럽게 쉬며 서로의 숨소리를 존중하고자 주의를 기울이는 일, 나는 그것을 사랑이라 부른다. 사랑은 모든 숨으로 쉬어져서 서로에게 쉼이 된다.



  세상의 모든 '그 아이'가 자신의 숨을 있는 그대로, 기분 좋게 쉴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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