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무게감(...과 두께감...)
오늘은 법의 날이라고 한다.
앵무새 죽이기. 원제는 To Kill a Mockingbird. (앵무새가 아니라 흉내지빠귀를 뜻하나, 바로잡기엔 이미 해적판 오역이 너무 널리 퍼진 탓에 그대로 두셨다고.)
이 소설의 화려한 업적이라든가 n쇄째라는 인쇄 기록은 오히려 '나 아니라도 읽을 사람이 널리고 깔린 책 같은데 그냥 읽지 말까. ...두껍군-_-. 구태여 안 읽어도 읽은 사람들이 말하는 걸로 십시일반이겠는데-' 싶게 만든다.
하지만 우연히 발견한 순간, 예전에 재밌게 본 드라마인가 영화에서 이런 대사가 나온 게 바로 떠올랐다.
"이건 앵무새 죽이기가 아니야."
아니면 이런 대사- "넌 애티커스 핀치가 아니야."와 같은 대사에 대충 이런 역주, *앵무새 죽이기의 등장인물* 같은 설명이 달렸던 것 같기도 하다.
아무튼 그 대사를 오롯이 이해하려면 앵무새 죽이기를 먼저 이해한 상태여야 했던 것이다. 진정 이해하려면, 누군가 이차 삼차로 전하는 말은 참고하되, 최소한 내가 직접 경험해야 한다.
아마도 그래서 집어 들었다. 정확히 모르는 단어를 대강 넘어갔다가 나중에 다시 떠올라 사전을 뒤지는 기분으로.
펼치고 보니, 내 손에 든 한국어 번역본이 특히 두꺼운 듯한 건 경어체로 서술됐기 때문도 있겠다. 평서체로 쓰면 반올림해서 1cm쯤은 책이 얇아지지 않을까ㅎ (다시 말해, 생각보다는 빨리 읽힌다.)
과연.
나의 찬사 따위는 말하여질 필요도 없겠다.
나로서는 유명작이라는 사실과 읽고 싶다는 충동 사이에 유효한 상관관계는 없으나, 긴 세월이 검증한 문학작품은 거의 대체로 명불허전이라는 편견은 있다(강력히 주장할 만큼 충분한 표본 수를 채우진 못했을 것 같아서 편견이라고 해 둔다). 요새는 웬만한 건 잡지처럼 읽다가 중도하차하거나 축지법 쓰듯 구멍 숭숭하게 읽어도 그다지 찝찝함을 느끼지 않는데, 오랜만에 단기간 집중해서 꼭꼭 씹으며 읽었다. 약 3주 동안 손에 쥐었던 날을 합하면 아흐레쯤. 중간까지만 읽고 덮거나 대충 넘기기엔 수시로 건질 것이 나오고, 마지막 페이지를 넘길 때는 뿌듯하면서도 괜스레 섭섭해 울컥했다. 그래, 명작은 대체로 '주어진 모든 챕터가 끝나면 일단 자연히 헤어질 걸 알면서도 기꺼이 깊이 사귀는 친구나 연인'에 가까운 것 같다. 아주 어릴 땐 '헤어질 거면 왜 시작을 해?'라고 생각한 적도 있지만, 사람을 만나는 건 독서와 별반 다름이 없다. 책을 만나는 것도 사람을 만나 그의 이야기를 알아가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책을 읽는 것과-누군가를 알아가는 것. 기억도 잘 안 날 만큼 오래 전부터 책장에 꽂혀 있어 표지는 익숙하지만 정작 제대로 펼쳐보지 않은 책과-이름과 얼굴을 알고 지낸 지는 오래됐어도 서로 속사정은 잘 모르는 친족이나 친구, 지인들. 읽어도 금방 까먹는 책과-이해했다고 느끼지만 언제든 돌아서면 마음에서 멀어지는 사람들. 짧지만 굵게 읽고 오래도록 이따금씩 되새기는 책과-인생의 한 모퉁이 정도를 함께 했을 뿐이지만 모퉁이를 돌아 완전히 새로운 시야에 눈뜨게, 돌아올 수 없는 강을 마법처럼 건너게 만들어 준 사람들.
이 책이 그것들 중 어디쯤에 위치할지는 딱히 생각해보지 않았는데(그런 건 장차 스며들듯 인지하게 될 것이므로)-
적어도 현시점에서 이 작품이 생각지 못하게 신경을 두드려 깨운 곳은 이 페이지인 것 같다. 모르던 걸 새로 깨달은 신선함은 아니지만,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사실을 마치 모르던 걸 깨달은 것처럼 곱씹게 했다.
무언가 중요한 것을 독자에게 전하는 것 같고 추천 대상이 되기도 하지만 저자조차 삶 속에 녹여서 이해하지는 못하는 책과-자기 삶의 모순을 간과하거나 방치하고 개선하지 못하면서 타인에게 묵직한 앎을 부박하게 들이미는 사람. 나 역시 나도 모르게 그런 멍청한 위선자였던 적이 있고, 살아 있는 한 언제든 또 그렇게 될 수도 있다는 우울한 경각심이 일었다.
...꾸란을 읽으면서 테러를 자행하는 자칭 무슬림들을 최대한 그들 입장에서 이해해보려 하는 요즘이다. 나는 과연 무함마드의 마지막 구절을 접할 때쯤엔 테러를 용납하진 못해도 그들을 조금이나마 이해하게 될까. (종교로 명분만 장식한 채 화풀이와 땅따먹기와 집권에 여념이 없었던 역사 속 다양한 전쟁광들과 거기서 거기 아닌가 하는 선입견은 잠시 제쳐두고...). ...-_-...다 읽는 일만 해도 무진장 오래 걸릴 것 같지만...
흠. 언제가 되면 '법은 모든 사람 앞에 평등하다'고 모든 사람이 말할 수 있게 될까.
BGM:
https://www.youtube.com/watch?app=desktop&v=S9bCLPwzSC0&t=1m39s
에미넴은 왠지 반항적 뜻도 살짝 저변에 깔고서 굳이 mockingbird라는 단어를 택한 것도 있을 것 같다는 건 그저 나의 망상에 불과할지도 모르나-(세상 모두가 죄 없는 mockingbird를 죽여선 안 된다고 할지라도, 그게 뭐가 됐든 널 슬프게 한다면 이 아빠가 (랩으로) 부숴버려 주마!-_-+라는...;;)
오래전 눈살을 찌푸리게 했던 그의 몇몇 언행과 실없는 몇몇 곡들에도 불구하고, 이 곡은 그의 다른 곡 When I'm gone이나 Like Toy Soldiers 와 함께 '아버지'라는 묵직함에 대해 새삼 므찌다ㅜㅜ하고 감동케 했다. 소설 Mockingbird 죽이기에서도 애티커스 핀치의 무게가 책의 두께를 기꺼이 견디게 하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