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크라테스 익스프레스>, 에릭 와이너
유머란 얼마나 다다르기 어려운 경지인가 생각한다. 우리는 간혹 유병재나 유세윤 같은 재치 넘치는 코미디언들의 농담을 듣고 농담 섞인 진담으로 그들이 얼마나 천재인가, 똑똑한가 농담한다. 눈앞에 드러난 것을 곧이곧대로 설명하지 않되 낯선 표현들로 정확하게 비유하면서도, 못 알아듣는 사람이 없고, 누구의 마음도 상하게 하지 않으면서 웃기는 능력. 앎과 배려와 사유를 한 데 모아 넣고 뭉근하게 끓이면 유머라는 게 나오는 건지도 모르겠다. 침대 위에 누워서 자신을 끓여낸 에릭 와이너는 어쩐지 유머와 어울리지 않는 철학을 화두로 가로세로도 모르는 사람처럼 자유롭게 농담한다.
탁월한 유머에는 인정이라는 단어가 요처럼 깔려있다. 보통은 남사스러워서 입 밖으로 내지 않지만 사람이라면 옆구리에 차고 다닐 수밖에 없는 수치스러운 것들을 인정하는 자세가 유머의 충전재다. 나만 어릴 때 요에 지도 그렸어? 밤마다 지도를 충분히 그린 어린이들은 차곡차곡 시간을 쌓아 이불 밖이 무서운 어른으로 자란다.
내 아이폰 알람 목록엔 24시간 x 60분만큼 이불을 걷어내지 못한 패배의 기록이 쌓여있다. 5분 만을 거듭 외치다가 모두 실패하고 마지막 1분을 부르짖은 참담한 흔적이다. 나만 이러고 사는 건 아니라서, 이른 아침 요람처럼 흔들리는 기차 안에서 식당칸으로 가고 싶었던 에릭 와이너는 덮고 있던 담요를 걷어내기 위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까지 끌어들여 침대의 깊이와 이불의 무게에 관해 사유했지만 결국은 일어나지 못했다. 철학 스타들을 줄줄이 읊는 뉴욕타임스 기자도, 제국을 제패했던 황제도 사람의 가죽을 쓴 생명체는 모두 같은 문제를 안고 산다. 그리고 침대의 재료가 될 나무의 거름이 되는 순간까지 그 문제를 완벽히 풀어내지 못한다. 그저 날마다 어제보다 좀 더 쉽게 일어날 수 있기를 바라볼 뿐이다.
나는 오늘 침대 위에서 이불에 갇힌 채, 뒤통수에 베개를 대고 누워 어느 뉴욕타임스 기자 출신 작가가 쓴 마르쿠스 <명상록> 독후감을 읽었다. 내가 이겼다. 그게 뭐인지는 묻지 말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