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의 발레일기
드디어 발레 수험생 생활이 끝났다. 11월 24일로 알고 있었던 시험날짜가 갑자기 당겨져 11월 17일에 시험을 보게 되었다. 코로나 상황 때문에 주최국과의 조율 끝에 시험 날짜가 앞당겨졌다고 한다. 매도 빨리 맞는 게 낫다 생각하며 11월에 접어 들고부터는 일주일에 3~4번 학원에서 집중 수업을 들으며 전의를 다졌다.
시험 전 주 일요일에는 시험장소로 리허설도 다녀왔다. 익숙한 우리 학원에서 시험을 보면 좋으련만. 지정된 시험 장소가 있다는 것은 또 색다른 경험이었다. 일요일 늦은 오후쯤 출발해 시험장소에 도착했다. 시험 복장으로 갈아입고 가볍게 몸을 푼 뒤, 전 타임 리허설이 끝나자마자 시험 장소로 입장했다. 처음 서야 하는 위치, 대기 위치, 이동 위치 등을 꼼꼼히 확인하고 실제 시험을 보는 것처럼 리허설을 시작했다. 그런데 바 워크부터 수정해야 하는 디테일들이 많았다. 동일한 튜토리얼로 시험이 진행된다 해서 고쳐야 할 부분이 있을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는데, 선생님마다 스타일이 조금씩 다르다 보니 그럴 수도 있나 보다. 학원 연습실보다 시험 장소 연습실의 크기가 작아 센터 워크는 조금씩, 때로는 완전히 변경되었다. 리허설 해보기를 정말 잘했다 생각하며 그날의 연습은 마무리가 되었다.
다시 학원으로 돌아온 다음의 수업시간에는 수정한 내용을 바탕으로 다시 연습을 하고, 부족했던 부분을 중점적으로 연습을 했다. 시험이 금방 다가온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급해져 집에서도 연습에 연습. 그러다 보니 정말 힘들던 댄스 프로그램 순서도 들어온다. 아직 느낌을 살리는 것이 어떤 것인지 감은 안 오지만.
드디어 대망의 시험 날. 아침에 아이 둘을 서둘러 보내고 학원으로 향했다. 다음 날이 대학수학능력시험이라 길거리엔 수험생을 응원하는 메세지가 가득하다. 분위기가 사람을 만든다고 했던가, 수능을 치러가는 고3처럼 괜히 웅장해지는 기분을 안고 리허설 연습 겸 레슨을 마쳤다. 이대로만 하면 될 것 같다며 서로 기운을 북돋아 주며 애써 긴장감을 털어 냈다. 레슨이 끝난 뒤엔 조르르 모여 앉아 시험 복장으로 갈아입었다. 그리고 나선 선생님에게 머리를 맡겼다. 난생 처음 해보는 발레리나 머리를 위해서다. 머리를 한데 모아 묶은 뒤 머리 망으로 감싸 올림 머리를 만든다. U핀으로 감싼 머리를 머리통에 단단히 고정시키고 잔머리는 젤을 발라 깔끔히 정리했다. 아직은 머리가 꽉 조이는 느낌이 어색하기만 하다. 그래도 이렇게 해야 머리가 작아 보이고, 그나마 비율이 좋아 보인다고 하니, 참아보기로 한다. 시험 잘 보라고 선생님이 달아 주신 연보라색 리본이 조금 민망하다.
만반의 준비를 마친 뒤 시험 장소로 출발했다. 예정시간보다 1시간 정도 일찍 도착하는 일정으로 서둘렀는데, 생각보다 앞 팀들이 시험이 빨리 끝나 서둘러 온 보람이 있었다. 대기 장소에서 몸을 풀면서 머리 속으로 다시 한번 순서를 복기한다. 떨지 말고 연습했던 만큼만 하자. 아니다, 연습한 것 보다는 잘해야 하는데. 복잡한 감정이 왔다 갔다. 사람의 마음이 이렇게나 간사하다. 마지막으로 배와 등 부분에 번호표를 붙였다. 키 순서대로 1번 2번 3번인데, 나는 2번이다. 2번 번호표를 괜히 한번 쓰다듬으면서 다시 한번 마음을 다 잡았다. 캐릭터 프로그램용 슈즈와 치마를 한 손에 들고 대기. 이제 진짜 시험 시작이다.
‘딸랑 딸랑’ 입장을 알리는 종소리에 시험 장소에 입장했다. 코로나 상황으로 인해 시험 영상을 녹화해서 영국으로 보낸다고 한다. 녹화 카메라 앞에 1번, 2번, 3번 수험생이 나란히 서서 인사를 했다. 인사가 끝난 뒤 곧장 바로 달려가 바 워크부터 순서를 시작했다. 다행히 바 워크는 실수 없이 마무리. 센터 워크에선 살짝 순서 실수가 있었지만 '이 정도는 괜찮겠지' 생각하며 나 틀리지 않았어요, 하듯 카메라 앞에선 방긋방긋 잘 웃어보았다. 가장 걱정했던 댄스 프로그램은.. 음.. 생각하고 싶진 않지만 그래도 나름의 느낌을 담아 끝까지 마친 것에 감사한다. (설마 떨어지진 않겠지..?) 현장 감독관 선생님, 카메라 촬영 선생님, 반주 선생님께 차례 대로 인사하는 ‘레베랑스 révérence’ 를 끝으로 5월부터 시작된 장장 6개월의 여정이 마무리가 되었다.
시험장에서 나오는 순간부턴 시험 결과는 잊기로 했다. 빠르면 내년 초에나 결과가 나온다고 하니 그 전까지는 마음 푹 놓고 다시 즐거움이 넘치는 취미 발레인으로 돌아가야지. 때로는 괜히 시작했나 싶었던 시험준비였지만 지난 6개월간의 수험생활은 나의 발레인생에 큰 터닝포인트가 될 것 같다. 선생님께 집중 트레이닝 받으면서 몸 쓰는 법에 대해 완전히 새롭게 깨달았고 그 덕에 같은 동작이라도 더 힘있고 길어 보이는 방법을 알게 되었다. (물론 알게 되었다는 것이지 할 수 있다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이 시간만큼은 온전히 나에게만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두 아이의 엄마로 나를 잠시 잊게 되었던 최근 몇 년 간 생각할 수 없는 호사였고 사치였다. 생애 몇 안될 특별한 순간으로 기억될 RAD 발레시험에 대한 기록을 이렇게 마무리 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