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에 처음 이 글을 썼을 때, 에른스트 곰브리치의 책 [서양미술사]를 낸 출판사 '예경' 관계자 한 분이 "벽돌책이라 읽기 쉽지 않은데 완독 하시고..."라는 내용의 댓글을 달아줬습니다. 벽돌책이라는 말이 있다는 것을 그래서 처음 알게 됐습니다.^^ 크고 두껍고, 무거운 책입니다.
대학생 때 처음 이 책을 읽게 됐는데 벽돌책 맞습니다만, 미술에 자신 없는 저도 경쾌한 속도로 처음부터 끝까지 읽을 수 있었습니다. [곰브리치 세계사]를 보신 분들이라면 알겠지만, 곰브리치 선생님은 글을 참 맛깔나게 잘 쓰는 분입니다. 그래서 요즘도 간혹 꺼내보는 책이며, 나중에 아이들에게도 선물하고 싶습니다. 상당히 크고 무겁기 때문에 여러 번 꺼내 읽다 보니 보관도 쉽지 않습니다. 아이들에게는 깨끗한 새 책으로 선물할 생각입니다.
세계사, 세계종교사 책을 읽고 나서 우연하게도 에른스트 곰브리치의 [서양미술사]를 읽었더니 머릿속에서 평면이던 인류 역사 이해가 다채로운 색깔 장식이 있고, 굴곡과 각이 도드라지는 입체로 다져진 느낌이다. [서양미술사]를 보는 누구나 공감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정말 많은 명화들이 전시회 도록처럼 글과 함께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펼쳐지고, 곰브리치는 미술 앞에 주눅 드는 사람들까지 쉽게 빠져들만한 글 솜씨로 미술 작품이 품은 이야기와 그 모든 작품을 매끄럽게 관통하는 세계사, 미술사를 꼼꼼하게 풀어낸다.
"끈질기게 자연을 관찰하는 데 있어서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어느 선배 못지않게 근실했다. 다만 그는 더 이상 자연의 충실한 노예가 아니었다. 아득한 옛날 사람들은 두려움을 가지고 초상화를 보았다. 왜냐하면 미술가가 형상을 보존함으로써 그가 묘사한 사람의 영혼을 보존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제 위대한 과학자인 레오나르도는 태초의 형상 제작자들의 꿈과 두려움을 현실로 만들었다. 그는 그의 마술 붓으로 색채 속에 불어넣는 주문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_303 페이지.
[서양미술사] 중 한 부분인데 아직 책을 읽지 않은 독자들을 위해 설명을 덧붙이자면 고대의 사람들은 죽은 사람, 혹은 아직 살아있는 사람의 영혼을 보존하기 위한 방식으로, 일종의 제의적 태도로 형상을 보존하는 그림을 그렸는데, 많은 시간이 흘러 붓을 든 레오나르도는 '보는 그대로 그리는 것'과는 상관없는 작가의 자유로운 느낌, 상상, 꿈과 두려움을 초상화 화폭에 담았다는 것이다. 바로 옆 302페이지는 누구나 한 번쯤은 봤을 법한 레오나르도의 대표작 '모나 리자'의 도판이 한 페이지를 가득 채우고 있어 곰브리치 선생님의 설명이 눈과 뇌에 쉽고 빠르고 정확하게 스며든다.
[서양미술사]를 보고 난 후에는 회화, 조각 등 미술 작품을 사진으로 접할 때 곰브리치 선생님의 설명이 절로 떠오른다. 비로소 "잘 그렸네."라는 단순한 느낌을 넘어서 그림이 담고 있는 당대의 이야기와 더불어서 그림의 구도와 빛, 같은 이야기의 다른 회화적 표현들을 조금이나마 이해하고 감상할 수 있게 됐다. 감상하는 재미를 선물 받은 셈이다.
에른스트 곰브리치는 [서양미술사] 서론의 첫 문장으로 [서양미술사]가 어떤 책인지를 소개한다. "미술(Art)이라는 것은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미술가들이 있을 뿐이다." 아마도 이 문장 때문에 내가 그 크고 두껍고 무거운 벽돌책을 끝까지 읽을 수 있었던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