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일 차: 글쓰기
쓰기 싫다, 쓰기 싫다, 그건 잘 쓰고 싶기 때문이다.
-《시간이 있었으면 좋겠다》 김신지, 잠비 p.216-
내 마음을 이것보다 더 잘 표현한 문장이 있을까. 작년 봄에 읽고 나서부터 집요하게 머릿속에 들어앉은 문장이었다.
어제는 《동물농장》 을 읽다가, 같은 책 뒤에 실린 조지 오웰의 에세이 <나는 왜 쓰는가>에서 이런 문장을 보았다.
책을 쓴다는 것은 마치 길고 고통스러운 투병 과정처럼 끔찍하고 피곤한 작업이다. 저항할 수도 이해할 수도 없는 어떤 마귀에 의해 쓰이지 않고서는 아무도 그 피곤한 작업을 따고 나서지 않을 것이다.
-《동물농장》 조지 오웰, 민음사 p.143-
위 문장과 형태만 다를 뿐, 갖가지 제목의 글쓰기, 책 쓰기 안내서, 에세이마다 다 실려있는 말이다. 글쓰기가 '고통' 아니라는 작가를 아직 한 번도 못 봤다. 그렇게도 책이 안 팔리는 시대를 살면서 출간작가, 나 같은 작가 지망생, 브런치 작가들은 왜 그렇게 고통스러운 글의 감옥에다가 스스로를 가두는 짓을 계속하는 걸까. 도대체 왜?
조지 오웰이 말하길, 산문 작가의 경우 '글 쓰는 동기'를 다음 4가지로 분류했다.
1. 순전한 이기심
2. 미학적 열정
3. 역사적 충동
4. 정치적 목적
그중에 저자 자신의 동기는 '정치적 목적'이라 했다. 《동물농장》은 사회주의 자체를 비판하는 소설이 아니라, 타락한 독재정권과 전체주의를 풍자하는 소설이라 했다. 그는 정치적 목적으로 글을 썼을 때만 자신의 글에 만족감을 표했다. 결국 자기가 추구하는 목적과 만족을 위해 고통스러운 과정으로 들어간 것이다.
고진감래(苦盡甘來)라는 흔한 사자성어가 있다. '쓴 것이 다 지나가면 단 것이 온다'는 뜻으로, 고생 끝에 즐거움이 온다는 말이다. 오늘따라 나는 맛이 '쓰다'는 뜻이 글을 '쓰다'는 뜻으로도 보였다. '고(苦)'는 진실이었다. 좀 더 내 느낌을 실어보자면, '고오오오오오오오오오진 +감래'였다. 쓰고, 쓰고, 또 쓰고.... '고(苦)'가 한 아홉 번 정도 지나가고 나면 한 번의 충만한 '감(甘)'이 와서 모든 보상이 되어 주었다. '진'이 빠질 때까지 쓰고 나면 얻을 수 있는 깔끔한 단물 한 모금이라고나 할까.
나는 왜 쓰는가.
나의 동기는 조지 오웰이 지적해 준 것처럼 '순전한 이기심'에서 출발한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다. 이타심이 먼저 와서 글쓰기를 시작했다고 스스로를 속여보려고도 해 봤는데, 아니다. 이기심이 맞다.
책을 싫어했을 때는 시큰둥했던 '작가'라는 직업이 책을 좋아하고 나서부터는 세상에서 가장 '멋있는 직업'이 되었다. 평범한 사람들보다 성공해서 상류층으로 가고 싶은 욕망, 좀 똑똑하고 멋있어 보이고 싶은 허영심, 잠자는 동안에도 통장에 쌓이는 인세로 파이프라인 구축, 내 '이름'으로 된 책 한 권을 역사에 길이 남기고 싶은 존재의 영원성 추구, 학교 공부로는 성공하지 못했지만, 늦게나마 가방끈 길이를 만회해 보려는 시도, 뭐 그런 것들이다. 그러니까, 나는 잘 쓰는 작가가 되고 싶은 거였지, 글을 쓰고 싶은 게 아니었던 것이다.
'작가가 되고 싶은가, 글 쓰는 사람이 되고 싶은가.'
그 질문을 던지는 작가들은 여러 권의 책을 계속 내는 사람들이었다. 글을 계속 쓰고 싶은이들이었다. '잘 쓰는 작가'가 되어 보려고 했더니 나는 한 글자도 쓸 수 없었다. 걸음마를 패스하고 육상선수가 될 순 없으니까. 그래도 희망이 되는 말은, 처음부터 잘 쓰는 사람은 없다는 점이다. 글은 '쓰면 는다'는, 아니, 글은 '써야 는다'는 사실이다.
내 글 쓰는 동기는 여전히 '겉멋'에 있다. 독서를 하거나 자격증공부를 하는 것처럼, '자기'가 '계발'되었다는 성취감을 느끼기 위한 객관적인 성장 지표로 글쓰기를 하고 있다. 뭐 어떤가. 내가 행복한 마음이어야 남도 행복하게 해 줄 수 있는데. 《당신은 제법 쓸 만한 사람》 을 쓴 '김민섭 작가와의 만남'에 참여했을 때 이런 말을 들었다. 첫 책은 나에서 출발하는 물음표여야 한다고. 나, 당신, 사회, 시대 순서로 가는 게 맞는 것 같다고. 그 말을 들으니 '일단 내 얘길 좀 먼저 써도 되겠구나' 하는 안도감이 들었다. 이기심으로 첫 번째 종이 책을 내고 나면 두 번째 책부터는 이타심도 좀 섞여 나오겠지.
내가 나 먹으려고 요리를 하기 시작했지만, 결국 남에게도 맛있는 요리를 해 줄 수 있었다. 글쓰기도 내 욕구에서 출발해서, 결국 누군가에게 도움 되는 한 줄이 될 거라 믿는다. 내가 지금은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식구들에게 맛있는 요리를 해 줄 수 있다. 식구들은 대체로 큰 손해 없이 '실패 없는 음식'을 먹는 혜택을 누리고 있다. 물론 처음부터 남편이 내게서 맛있는 음식을 먹은 것은 아니었다. 그에게도 '고진'의 시간이 있었다. 아래는 2012년에 결혼 후 2020년에 쓴, 무려 8년만에 김치 흉내를 완성한 날의 기념 일기다.
여전히 지금도 가끔 도저히 다시 살려 볼 수 없는 '벌칙 같은 요리'를 선보일 때도 있지만, 남편은 손해 보는 게 없다. 얼마나 촉이 좋은지, 이젠 눈으로도 맛을 때려 맞추는 경지에 올랐기 때문이다.
"역시, 니 맛도 내 맛도 아니네........ 여기서 설탕 쪼끔만 더, 마늘 더 넣으면 딱이겠는데."
결국 요리든 글이든, '니맛도 내 맛도 아닌 맛'을 먹어보는 것도, '맛잘알 독자'가 되어가는 과정이라 생각한다. '그 음식을 어느 식당이 잘하더라'라는 안목도 생기고 말이다.
그러는 의미에서 이 글을 읽어주시는 독자와 작가분들께 급히, 감사의 인사로 마무리한다.
저의 마루타가 되어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점점 더 좋은 글 쓰는 작가가 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