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일 차 : 처음
처음 도시로 이사 갔던 해에는 답답해 죽겠다는 생각을 했다. 잿빛 하늘색, 앞산, 뒷산 대신 보이는 똑같은 앞집, 옆집, 뒷집. 시골에는 온 천지가 놀 거리와 가볼거리, 잡을 거리였는데 도시에선 볼 수 없어서 우울했다. 내가 열두 살 때, 2층짜리 양옥 다가구주택인 할아버지댁에 우리 다섯 가족은 1년 정도 얹혀살았다. 내 방은 대학을 다니는 막내고모의 방을 함께 썼다. 부모님은 일터에서 돌아오면 밤이었고, 명절 때나 왔던 친가에서 조부모님과 하교 후에 보냈다. 지금 생각하면 우리 식구까지 거두시느라 정말 힘드시고 불편하셨겠다만 그때는 그저 우리 가족 살 집 없이 도시에서 눈칫밥을 먹고 있는 우리 가족의 신세가 싫었다.
거실로 난 나무 창문틀에 턱을 괴고, 입을 'ㅅ'자로 만들어 창 너머를 초점 없이 바라보고 있으니 할아버지가 물으셨다.
"야가 와 먼 산을 보고 있노?"
"할배, 대구는 너무 숨이 막혀요. 다 회색이에요. 저는 새장 속에 갇힌 것 같아요."
할아버지는 뜬금없는 내 말에 기가 차서 다른 식구들을 불렀다.
"어매, 야 봐래이, 어이? 야가 와 새장 속에 갇힜다 카노!"
"뭐라 카노? 새가 어데 있다꼬?" 할머니가 부엌에서 나왔다.
"아니요.. 제가 새장에 갇혀 있는 새 같이 답답하다고요."
"아아, 니가 답답다꼬?" 할머니의 대수롭지 않은 대응이었다.
답답하면 어쩔 것인가, 다시 돌아갈 수 없는 내 고향인데. 자그마치 3년 동안 나는 향수병에 걸려 시골 추억을 되새기며 초등학교 5학년, 6학년, 중학교 1학년을 보냈다. 그 후로 친한 친구들과 도시를 적응하며 살다 보니 적응이 잘 되었다.
그렇게 시골타령하던 내가 20살이 되자마자 더 심한 도시인 서울 구경을 가 보았다. 그 빌딩숲과 지평선 보이지 않는 번화가 풍경에 턱이 쩍 벌어졌지만, 이내 적응했다. 뭐든 처음이 어려운 거니, 여기도 곧 적응되겠지, 하고. 그 후도 대구라는 지방도시는 크게 그리워 한 적이 없다. 자주 갔던 동성로 떡볶이와, 대구에 있는 '명동돈가스'가 그리울 때 말고는. 서울이라는 대도시는 뭐든 많아서 좋았다. 문화를 즐기고 특색 있는 번화가가 군데군데 많았으니 혼자 구경하는 것만으로도 재미있었다. 하지만 가끔씩 다시 시골 고향이 그리워졌다.
서울숲과 남산으로는 해결되지 않는, 집 앞에 초록색 풍경을 끼고 살았던 삶, 대청마루에 앉아서 느긋하게 앞산을 바라보다가 맨발로 슬리퍼를 신고 나가 집 앞 냇물에 발 담그는 삶이 그리웠다. 내가 기억하는 첫 고향이기에 그토록 마흔이 넘어서까지 강렬한 첫사랑으로 남아있다.
지금 다시 시골생활 하라 하면 손사래를 치련다. 자급자족 하는 삶은 어른으로서는 고단하고 막막한 일이다. 수입원은? 병원은? 또래 친구들과 아이 학교는?
어린 시절, 그 어떤 경제적 책임도 내게 없었기 때문에, 어떤 비교대상도 없었기에 그 시골을 온전히 처음 사랑할 수 있었다. 그래서 그곳을 다시 찾아가는 것도 지금은 싫다. 첫사랑은 그때의 모습 그대로일 때가 좋다. 그땐 이랬는데 다시 보니 변했네, 하고 실망할 게 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