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박지는 만만해

27일 차 : 김치

by 나예스

처음 석박지를 알게 된 건 프랜차이즈 설렁탕집이었다. 무를 반달 모양으로 큼직하게 한 번만 잘라 두툼하게 담근 석박지는 겉절이 배추김치와는 다르게 일부러 삭혀서 나왔다. 가위로 잘라서 한입 먹으면 무른 듯한데 아삭하고 새콤한 것 같은데 달달한 석박지의 맛은 깍두기와 다른 매력이 있었다.


결혼을 하고 나서 여러 번 배추김치 담그기에 실패했다. 처음으로 만든 김치는 너무 오랫동안 절여서 씹을수록 질겅하게 짠맛이 입안 가득 퍼졌고, 두 번째 김치는 간이 덜 되어 빨리 흰 곰팡이가 끼면서 곰팡이 닿은 부분부터 푹 물러버렸다. 오래된 고춧가루를 썼는지, 맛 전체가 이상한 고추씨 풋맛이 나는 김치를 남편 밥상에 올렸다. "왜 내가 만든 김치를 안 먹어?"

"솔직히 너도 안 먹는 건 권하지 말자."


인터넷에 잘 나와 있는 레시피대로 질량을 맞추는 게 번거롭다는 이유로 나는 여러 해 더욱 번거로운 김치 실험을 했다. 가루형 유산균 분말이나 식용 EM분말로 유산균을 유도했고, 블루베리잎이나 구아바잎으로 신선도를 유지해보기도 했다. 한입 크기로 잘라서도 버무려 보고, 잎을 한 장 한 장 떼어서 길게 한 번만 잘라 칼국수집처럼 긴 채로도 버무려 보고 절임배추도 써 봤다. 여름배추와 겨울배추도 맛이 달랐고, 자색 양파처럼 자색 배추도 있어서 만들어봤지만 배추 자체의 단맛이 덜하고 특유의 자색 양배추 같은 맛이 거슬렸다. 정말 김치는 어려웠다. 그 갖은 재료로 등줄기 아파가며 만드는 것보다 인터넷에서 사 먹는 게 더 싸고 맛도 무난했다.


그에 비해 석박지는 얼마나 간편하고 무난한가. 배추는 써는 것도 애매하고, 허연 줄기와 잎사귀 부분이 다르게 절여진다. 석박지는 똑같은 질감과 비슷한 두께로 썰어 반달 모양의 무가 점보지우개처럼 잘 휘어질 때까지 절여서 맛을 보면 양념하기 전에도 달게 간이 배었다.


천일염은 일본 방사능 오염사태 전에 염전에서 긁었다는 신안 천일염을 웃돈 주고 구매해 둔 것으로 절였다. 젓갈은 늘 시판의 맑은 멸치액젓이나 까나리액젓을 쓰다가, 액체 육젓으로 좀 더 걸쭉하고 탁한 것을 찾기 시작했다. 급기야 친정엄마가 직접 생선가게에서 제철에 나온 멸치와 밴댕이를 사서 만든 귀한 젓갈을 체에 내려서 지난 초겨울에 석박지를 만들었다. 역시, 깍두기처럼 더 썰 것도 없는 석박지라 만드는 부담이 덜했다. 찹쌀풀을 과하게 넣어서 너무 질퍽하게 양념이 묻었지만, 맛에 큰 영향을 주지 않았다. 가위로 자르고 나면 깍두기에 비해 빨간 양념이 묻어나는 면적이 적어서 덜 매운 느낌이었다. 다음에도 배추김치에 도전하겠지만, 만들 때마다 나도 모르는 나만의 레시피이니 다시 그 맛 내기도 어려울 것이다.


기분 좋은 날이 아니라, 체력 좋은 날이 아니라 그저 채소가게에서 질 좋아 보이고 가격 좋을 때가 김치 담그는 날이 될 거다. 11월 초에 만든 석박지를 한 달 반 안에 다 먹었으니 다음엔 무를 좀 더 많이 사봐야겠다. 배추보다 훨씬 만만한 무를 썰어서 석박지를 만들어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