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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예스 Aug 08. 2023

<유치원노래 2집>

동요 리스닝으로 다져진 유치원 인생.  

나 7살, 동생 6살. 우리가 처음 유치원을 등원하던 날과 약 5일 정도는 아빠의 트럭을 타고 가니 편했다.

한눈에 보이게도 멋이 안나는 1.4톤 트럭을 타고 <유치원노래 2집>이라고 적혀있는 카세트테이프를 들으며 등원했었다.

사실 <유치원노래 2집>은 우리 남매에게는 잠재의식의 일부나 다름없다.

집에서 하릴없이 있을 때도, 영농후계자 모임에 따라가는 날에도 , 면내 5일장을 따라가는 날에도 늘 우리와 함께 했다.  엄마아빠가 이 노래를 좋아서 트는 게 아니라는 것은 언제 아느냐?

우리가 어른들 모임에 따라갔다가 밤길을 오다 보면 검은 포장도로에서 마을 입구부터 시멘트를 부어만든 도로를 지나, 드디어 흙먼지 날리며 차 한 대 겨우 지나갈 수 있는 비포장도로의 크고 작은 돌들이 바퀴에 걸릴 때쯤 피곤해서 선잠을 드는데 그때부터는 딸각-거리며 노랫소리가 바뀐다.

<소양강 처녀> 또는 <립스틱 짙게 바르고>가 흘러나오는 것이다.  (잠든 건 아니지만 졸려서 눈감고 있다.)


<유치원노래 1집>은 잃어버렸는지,  고장 나서 버렸는지 노상 같은 테이프만 외우다시피 2년 이상을 들은 것 같다.

그래도 나름 신은 났다.  다음곡이 무엇인지 맞추는 재미도 있고,  키득거리며 버퍼링을 따라 부르는 것도, 동생과 함께 들으니 재미있었다.



<으쓱으쓱> 노래는 방정맞게도 '짤랑짤랑 짤랑짤랑 으쓱, 으쓱?!'으로 시작하는데 모든 율동이 어디에서 배운 지는 모르겠고 구르는 장면 빼고는 마당이든 길가든 상관없이 따라 하기 좋았다. 떼구루루~ 구르고 , 벌떡 일어서 떼구루루~ 구르고 ~! 하는 부분은 겨울 이불 위에서 따라 하기 안성맞춤이었다.


지금 나의 아들이 초등학교 1학년인데, 어린이집 다닐 때 BTS 팬인 아미 담임 선생님 슬하에서 노래를 듣고 키즈카페에서 나오는 BTS 노래를 흥얼거리던 문화보다는 확실히 순수했던 것 같다.


<꽃밭에서> 노래는 '아빠하고 나하고 만든 꽃밭에~ 채송화도 봉숭아도 한창입니다~ '라는 가사가 나오는데 실제로 아빠와 마당 앞에 있는 대왕 봉숭아(나무인가 싶을 정도로 컸다)도 키우고 배꽃은 피나 배는 아직 안 열리는 어린 묘목들, 살구나무를 키우며 호스로 물 주기도 했기 때문에 생각이 난다.


<엄마야 누나야> 노래는 너무 구슬프고 졸리게 불러서 강변 살자- 하는 그 강변이 슬픈곳이구나.. 추측할 뿐이었다. '뒷문 밖에는 갈잎의 노래- ' 부분에서  우리 집은 뒷문이 없는데 저 안방 벽 뒤에 뒷문이 생긴다면 도둑고양이들이 놀라서 도망가겠지? 같은 생각을 하기도 했다.


<서로서로 도와가며 > 노래는 '아랫집 윗집 사이에 울타리는 있지만~ '으로 시작하는데 뒷집, 앞집 싸리나무 울타리나 사과밭 옆 탱자나무 울타리를 떠올리며 들었다. 아무리 들어도 [서로서로 도와가며 형제처럼 지내자~ 우리는 한겨레다, 단군의 자손이다! ]라는 노랫말이 황당했다.  

왜 갑자기 단군인지,  그걸 초등학교 5학년 때쯤 깨달았다.

아랫집과 윗집이 아파트를 말하는 것도 아니고 우리 집 뒷집과 앞집도 아닌 북한과 남한에 대한 노래라는 것을. 지금은 '통일'이라는 단어가 낯설지만 30여 년 전에는 당연히 한국인 모두의 소원인 줄 알았다.

내가 남한에서 밥을 남기면 북한 어린이가 굶어 죽는 줄 알았다.


어느 정도 낯선 읍내의 풍경이 익숙해지고 함께여서 용감해지고 나니 동네 언니들이 한동안 같이 등교해 주었다.  같이 등교라 함은 우리 마을에 사는 3~4학년 언니들이 유치원생인 우리와 함께 인적도 거의 없는 길 4km를 함께 동행해주는 것이다.


초등학교(당시는 국민학교) 1학년이 다 되어 갈 때쯤에는 남자 사람친구와 나, 그리고 내 남동생 이렇게 '삼총사'라고 자칭하며 병설유치원 등 하원을 했다.


참 이상하게도 등원도 같이 하고 하원도 같이하고 , 주말에 같이 놀기도 했는데 유치원만 갔다 하면 따로따로, 모르는 사이인 것처럼 지냈다. 말수도 적고 낯가림이 심한 나는 세상 외톨이가 되었다.

면내에 사는 6~7세 여자 아이들은 병원놀이를 하고 놀았다.

내가 쭈뼛거리고 있어도 아랑곳하지 않고 환자, 의사, 간호사는 본업이라도 된다는 듯이 진료에 집중했다.


지루한 자유놀이시간과 좀 집중해볼까 싶으면 끝나버리는 미술시간이 지나갔다.

조별로 나누어 쓰라고 나누어준 그 핑킹가위가 있었다. 나도  색종이를 지그재그로 오리고 싶었는데 다른 아이가 쓰느라 내 차례가 오지 않아서 속이 상했다.


노래가 빠지면 섭섭하다. 선생님의 오르간에 맞추어 나오는 동요를 신나게 따라 부르고 나면 동네 친구와 나와 내 남동생으로 이루어진 '삼총사'는 다시 한집에 사는 사람처럼 뭉쳐서 집을 향하여 걸어갔다.

<유치원노래 2집>으로 다져진 음악근육은 이럴 때 나에게 소박한 자신감을 주곤 했다.


동생과 나, 이사진은 집앞에서~

무더운 여름날엔 나무가 드리워진 제법 깊은 샘물에서 각자 널찍한 바윗돌에 선녀처럼 옷을 벗어놓고 (요즘 세상엔 상상도 못 할 일이다) 수영도 하고, 다슬기(고디)도 잡았다.

(가끔 나오는 가재는 산성비와 태풍 홍수 이후로 자취를 감추었다. )


방수가 되는 돌핀 손목시계는 차고 물놀이를 하고 있으면 우리가 너무 오래 놓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 친구가 자기 집이 있는 데까지 약 1시간 30분가량 가고 나면 이제 우리 집도 여기서 빠르면 15분 걸으면 도착한다는 안도감과, 조금 더 가까운 곳에 집이 있는 친구에 대한 부러움이 혼합되어 막판 스파트 힘을 내게 된다.


힘겹게 집에 도착하면 어느새 <유치원노래 2집>이 흘러나오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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