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일 차 :요리
남편을 위해 첫 번째로 만든 요리는 죽과 짬뽕이었다. 그게 오늘 떠올라서 헛웃음이 나왔다. 남편이기 이전에 남자친구였을 때였다.
서울시 소재의 직장에 근무하는 미혼 여성 근로자를 위한 숙소에 살 때다. 보증금은 60만 원대 정도였던 것 같고, 20여 년 전의 월세는 놀랍게도 2만 2천 원이었다. 작은 아파트에 방 2개와 주방, 화장실 하나가 있었고, 큰 방을 2명이 사용하고, 작은 방을 1명이 사용하는 거였다. 나는 2인실 드넓은 방을 혼자 사용했다. 나와 함께 쓸 사람이 들어오지 않아서 옆방보다 큰데 절반의 월세만 내는 게 얼마나 기뻤는지 모른다. 공용 주방도 있었다. 옆방 처녀는 나보다 두 살이 어렸는데 내가 입실하기 전 몇 달 동안 공용공간을 한 번도 청소하지 않은 것 같았다. 왜냐면 주방 수세미만 있고, 화장실 변기솔이라던가 청소도구는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옆방은 음식도 해 먹지 않는다고 했다. 아닌 게 아니라 아침에 나가면 늘 밤에 들어왔다. 나는 집 다운 집에서 살게 되어 물 만난 물고기처럼 신이 났다. 다이소에 가서 식기건조대도 사고, 수세미와 청소도구도 샀다. 주방과 화장실의 찌든 때를 모두 벗기고, 미니냉장고도 깨끗이 닦았다.
호텔조리과를 나왔지만 독립 후 나를 위해 자취음식을 한 건 처음이었다. 정보의 부재로, 보증금 없는 월 20만 원 짜리 1.2평 고시원을 옮겨 다니며 생활한 적이 많았다. 고시원에서는 아무래도 열몇 명이 되는 아저씨들이 공용 주방에 수시로 들락거렸기 때문에 혼자 식재료를 다듬어 음식을 해 먹는 일은 낯이 뜨거웠다. 자연스럽게 나도 그들처럼 컵라면을 사 와서 고시원 제공의 밥을 말아먹었었다.
그때에 비하면 여성 근로자 아파트는 호텔이었다. 호텔에서는 호텔요리가 나오게 마련이었다. 공용주방이지만 나 혼자 쓰는 주방이었다. 장도 보고, 조리학원에서 선생님이 알려 주셨던 짬뽕도 만들었다. 모처럼 그 주말에는 남자친구에게 중국집만큼 맛있지는 않아도 느낌이 나는 짬뽕국을 만들어서 갖다 주려고 한껏 장을 봐 왔다. 주말에 데이트는 말하지 않아도 정해져 있는 약속인 것이다. 고운 고춧가루와 식용유로 고추기름을 내고 양배추를 볶고 있을 때 남자친구가 전화가 왔었다.
"자기야... 나 오늘 몸이 좀 안 좋네."
"몸 어디? 감기야?..."
"감긴 지 뭔지, 몸살끼가 있어서. 오늘은 아무래도 못 볼 것 같네...."
"아니 어쩌다가... 나 자기 주려고 짬뽕 만들고 있었는데."
"미안. 진짜 미안... 다음에."
"할 수 없지, 잘 쉬어."
갑자기 맥이 탁 풀렸다. 홍합이며 양파며 손질도 마친 상태라 일단 다 만들어야 했다. 원래는 내가 먹고 싶어 만든 거니까. 그리고 야채죽을 만들기 시작했다. 본죽을 살 수도 있겠지만 직접 만든 걸 먹으면 감동받을 거라고 생각하니 힘이 다시 생겼다. 오늘은 아프다니까 죽을 먹고 몸살끼가 좀 가시면 짬뽕국을 먹으면 될 거였다. 야채죽과 면 없는 짬뽕을 깊은 밀폐용기에 각각 담았다. 제법 무거웠다.
버스-지하철- 지하철-지하철- 버스를 갈아타니 1시간 반정도 걸려 도착했다. 3층 창문을 올려다보며 전화를 걸었다.
"자기야. 창문 열어 봐."
"어?.... "
순간 정적이 흐르고 맑고 경쾌한 '탁' 소리가 났다.
"어디야?....." 또다시 '탁' 치는 소리. "당구장이구나."
아프다고 속인 후 당구장에 간 남자친구를 위해 만든 죽이라니. "창문 열어 봐"가 왜 이렇게 혼자 창피한지 화가 치밀어 올랐다. 손절 타이밍이라 여긴 나는 바로 전화를 끊고 버스 정거장으로 갔다. 버스가 올 생각을 않자 지하철 역까지 걸어갈 심산으로 무작정 걸었다. 무거운 음식을 든 가방을 한쪽 어깨에 메고 걷는 중에 끈질기게 전화가 걸려 왔다. 넘겼다가 받고 바로 끊었다가, 진동이 울리도록 내버려 두다가 마지막 통화니 얘기나 들어보자 싶어 받았다.
"내가 잘못했어. 어디야?"
알아듣든가 말든가 건너편에 보이는 간판 이름을 대고 있는 나는 왜 분노의 경보를 하고 있던 걸까. 찾아오란 소리였나 보다. 거짓말같이 그쪽에 남자친구가 나타났다. 하필 그쪽 편 당구장이었던 것이다. 대로를 사이에 두고 전화를 하며 한 방향으로 걷고 있었다. 그냥 친구랑 당구를 치고 싶다고 하지 왜 거짓말을 했냐며 다그치고 아무튼 오늘이 끝이라고 선언했다. 때마침 횡단보도에 불이 켜지고 남자친구는 길을 건너왔다. 가방은 무거워서 뛸 수 없었고, 몸살 시늉을 했던 자는 싱글벙글 웃으며 목소리만 간절하게 사과를 했다.
무거웠던 음식을 모두 전달해주고 나니 발걸음이 가벼웠다. 다음날 음식을 맛있게 먹었다는 소릴 듣고 나니 속도 없지, 기분까지 날아갈 것 같았다. 손에 물 한 방울 안 묻히게 하겠다는 그 흔한 거짓말을 듣고 결혼해서 지금도 남편의 밥을 담당하고 있다. 귀찮을 때는 종종 휴업도 한다. 같이 살면서 알게 된 건 남편은 죽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어떤 맛죽을 해 줘도 안 먹는다. 그 때를 생각하니 웃음이 나온다. 내가 주고 싶어서 준 거였지, 남자친구를 위한 요리가 아니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