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우지 못한 자의 슬픔

45일 차 : 비움

by 나예스

같은 아파트에 사는 남의 집에 가면 자주 놀란다. 비슷한 구조나 똑같은 평형에서 이렇게 안락하고 힐링되는 집에서 살 수도 있다는 게 보고도 믿기지 않는다. 인테리어 소품 하나도 우리 집에서는 쉽게 묻히는데 다른 집에서는 센스 있는 포인트물건이 된다. 모든 물건을 못 버리는 건 아니지만 내 눈에 밟혀서 아직 쓸만해 보이는 물건이 유독 많은 것 같다.


내가 지저분한 잡동사니 모둠의 공간을 좋아해서 물건을 모시고 사는 것은 절대 아니다. 나도 깨끗한 공간을 좋아한다. 다만 우선순위에 정리정돈이 없다. 애초에 물건의 정해진 위치도 잘 모르겠다. 눈에 가장 많이 띄고 빠르게 손길에 닿을만한 곳에 내가 자주 쓸만한 물건을 놓아두다 보니, 테이프와 가위 같은 것이 용도에 맞는 공간 여기저기에 배치된다. 이제 보니 효율을 추구했던 게 아니다. 귀찮음 때문이다. 그 물건을 가지러 가기까지 가기 싫은 것이다.


아이도 보고 자란 바가 있어서 그런지 나와 비슷한 책상 환경을 가지고 있다. 무언가를 버리려면 여러 번의 설득 끝에 납득이 되어야 한다. 미니멀한 공간을 위한 버리기 책을 봐도 대청소하는 일주일 그때뿐인걸 잘 안다. 손님을 초대하기 전날이 대청소 목표일이 된다. 이 꼴을 보여주기 싫어서 청소하다 보면 목적이 실은 뒤바뀐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청소를 하기 위해 손님을 부르고 있는 건 아닐까 하고 말이다.


"내 방 상태가 내 마음의 상태다" 같은 말과 "내가 먹는 것이 곧 내가 된다" 같은 말은 자주 나를 자책으로 이끈다. 내가 매일 쓰는 공간을 돌보지 않는 것은 나를 돌보지 않는 것과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다. 남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만 사는 것 같다고 남편을 타박한 적이 많았는데, 바로 내가 그렇다는 걸 깨달았다. 가족 모두가 닮아가는 것 같다. 내가 가진 욕심은 결국 남에게 쓸모를 인정받기 위한 욕구였다.


며칠 전부터 당근마켓에 판매 등록하고 처분되지 않은 상태 좋은 책을 더 가격을 내리거나 나눔으로 돌려야겠다. 작년 가을부터 비움을 미루고 있다. 비움의 주간에는 하루 한 구역씩 몸살 날 정도로 치우고 버리는데, 사실 남의 눈에는 그다지 비운 흔적이 느껴지지 않을 터다. 평소에 안 하다가 날 잡고 하려니 시간을 떼어내야 한다는 부담이 든다. 정리보다는 글쓰기와 독서에 시간을 더 할애하고 싶어 계속 후순위가 되었던 것이다. 내가 감당할 수 있는 만큼만 짊어지고, 나머지는 적극적으로 비워야겠다.


이번 구정 전에 우리 집에서 아파트 독서모임 분들과 저녁에 김밥 분식 번개모임을 열기 위해 3시간 이상을 할애해서 주방과 거실의 잡동사니를 치웠는데, 당일에 시어머니가 돌아가셔서 일정이 이달 말로 연기되었다. 지금 다시 주방 아일랜드식탁 쪽과 식탁을 둘러보니 그 위로 잡동사니가 슬금슬금 올라가 있다. 3시간을 투자한 보람을 유지하기 위해서 오늘은 그곳 먹는 약이며 로션과 잡동사니는 치워두고 자야겠다. 신우리 작가의 <도망가자, 깨끗한 집으로> 책에서 치운 소파 위나 식탁 위로 다시 올라오는 옷가지나 물건 하나가 '어질러도 좋다는 사인'이라고 말한다. 그 한 개의 물건이 깨진 창문의 효과처럼 예전의 어질러진 상태로 돌아가게 하는 스타가 되어준다.


사실 오늘의 영감어 '비움'을 접했을 때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물건'이 아니었다. 며칠째 장의 순환이 좋지 않기 때문이다. 이 속을 비우고 싶다는 생각이 가장 많이 든다. 장 운동이 안 되는 채로 정체되어 있었다. 장 운동도 천천히, 소화도 천천히. 점심에 건더기 위주로만 먹은 순댓국이 저녁까지 배부르다가 결국 식도염이 되었다. 남편은 아주 그럴듯한 가설을 세웠다.

"너는 똥을 못 싸서 역류성 식도염에 걸린 거야. 음식이 내려가야 되는데 떡 버티고 있으니까 올라오는 거지. 그거 다 똥독이야. 신김치 먹고, 청국장 먹고, 어?"

그거였구나. 4개월간 내과에서 듣지 못한 천기누설을 남편에게 들은 셈이다. 오늘 배에 마사지볼도 굴리고 소금물도 조금 마신 결과 어쨌든 상쾌한 저녁을 맞이했더니 밥을 체하지도 않고 맛있게 먹었다.


집안에 내가 감당할 수 있는 짐만 남기고 모두 비워야 상쾌한 공간이 되듯이 몸도 노폐물을 제때 비워야 상쾌한 컨디션이 될 수 있었다. 만석 식당도 자리가 나야 손님을 들일 수 있는 법인데 그 당연한 이치를 또 안일하게 방치하다가 이제야 수긍한다. 우주는 빈 공간을 좋아해서 마음을 비우면 채우고 싶어 한다고 한다. 내 삶이 정체되지 않기 위해 오늘은 식탁 위 물건을 치워 비움을 실천하고 개운한 마음으로 잠들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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