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일 차 : 기록
10년 전에 네이버 블로그로 육아기록, 독서메모 등을 끄적일 때가 있었다. 블로그의 운영 목적은 맛집 체험단을 하기 위한 목적이었다. 여동생이 당시 상위 5% 이내의 블로거였고 공짜로 음식을 먹으러 따라다니다가 '어디 나도 한번?' 하고 시작했던 것이다. 그러다가 블로그 이웃님이었던 '행꿈가득'님이 하루 15분 박경리의 <토지>를 읽고 필사할 분을 온라인으로 모집했다. 미션 성공 시 돌려받는 참가비가 있었고, 방대한 20권 분량도 태산 같아서 나는 그냥 멀리서 응원하는 마음이었다. 그러다 댓글을 달고, 권유를 받으니 한 달만 도전해보기로 했다.
처음 노트와 두 가지 색의 볼펜을 준비해서 다짐을 노트 첫 장에 적는데 손아귀에 쥔 볼펜이 어찌나 이질감이 느껴지던지. 청소년부터 20대 때 다이어리를 조금 쓰다 말린 했지만 스케줄이나 메모 정도만 썼던지라 노트에 필기에 손 뗀 지가 10년이 훨씬 넘었던 것이다.
'내 글씨가 이랬구나.'
컴퓨터나 휴대폰 자판으로 써 오다가 특정 목적의 종이 노트를 정해서 베껴쓰기와 내 생각 쓰기를 하는 경험은 특별했다. 독서하다가 떠오르는 생각은 늘 휘발되어 왔기에, 내가 마음에 들어 했던 문장을 붙잡고 생각이라는 것을 한 다음 끄적이는 것은 비효율적이라서 더 기억에 남는 듯했다. 처음엔 문장에 대한 내 생각을 뭐라고 적어야 할지 몰라서 뇌가 멈춘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러다 나중엔 자연스럽게 네 줄이 넘어갔다. 그날 내가 관심에 두던 즉흥적인 생각과 문장에서 공감대가 생기면 '이거다' 싶어 옮겨 적었다. 생각 쓰기는 결국 하루 끝에 쓰는 일기장이나 다름없이 나의 생각 패턴을 알 수 있었다.
학생용 '공책'으로 시작하고 나니 가방에 넣고 다니기 불편해서 다른 분들처럼 두 번째 노트부터는 책과 비슷한 크기로 마련했다. 볼펜을 다 쓸 때마다 공부를 잘 한 느낌이 들어 뿌듯했다. 그렇게 박경리의 대하소설 <토지> 전 20권을 읽고 재독을 하면서 또 다른 부분을 필사했다. 그다음엔 최명희의 미완결 대하소설 <혼불> , 조정래의 <태백산맥>까지 함께 하고 나서 2년여 기간의 챌린지를 종료했다.
신기하게도 그런 미션이 없으니 독서량이 줄어들었다. 한동안은 홀가분한 마음으로 여가시간을 보냈고, 어느 날 문득 내가 독서를 거의 하지 않은 지 반년이 지났다는 걸 깨달았고, 다시 시작하는 독서는 노트에 필사를 곁들이며 하게 되었다. 오래 쓰면 손이 아파지니 힘 안 들이고 쓰는 만년필로 바꿨다. 쓰는 양이 2배로 늘었다. 특히 도서관에서 빌린 책은 나에게 와닿은 문장을 더 열심히 베껴 쓰게 되었다. 그러다가 '이 좋은 거'를 같이 하면서 집 가까운 곳에 책 친구를 만들면 좋을 것 같아서 아파트 독서 필사모임을 만들었다. 고인 물 멤버들과 필사 사진을 공유하다 보니 어느덧 세 달 뒤면 개설 3주년이다.
직접 적은 노트는 대체로 책 두께 만한 것으로 19권, 반 두께만 한 노트로 6권이 모였다. 자꾸 늘어나는 이 노트가 어떤 쓸모가 있을까. 장기 기억을 위해서라면 책에 직접 줄 긋고 쓰거나, 잊히기 전에 읽어야 한다. 그러나 주기적으로 노트를 펴서 읽어보지 않는 편이다. 나는 필사노트를 쓰고 간직하는 동안 다음과 같은 효능을 느꼈다.
1. 좋은 책이라는 느낌만 남았던 책에 대해 다시 궁금할 때, 어떤 부분이 좋았다고 느꼈는지 찾아볼 수 있었다.
2. 재독 하는 책은 그때 내 상황과 생각에 따라 선택한 문장과 다짐이 달랐다.
3. 갑자기 책의 어떤 부분이 떠오르면 박제해 둔 온전한 문장을 다시 볼 수 있었다.
4. 막힘없이 술술 쓰게 되었다.
5. 쓰는 동안 작가의 표현력이나 멋있는 말을 천천히 배울 수 있었다.
6. 만년필의 사각사각 소리와 독서한 흔적을 느리게 남기는 시간으로 마음이 편안해졌다.
7. 따로 일기를 쓰지 않아도 내 생각의 패턴을 알 수 있었다.
8. 소근육운동과 뇌 운동을 할 수 있었다.
9. 나만 보는 거라, 말 실수해도 아무 문제가 없었다.
10. 실물로 성과를 차곡차곡 쌓는 재미가 있었다.
이제 하루라도 독서 필사를 안 하면 기분이 찝찝하다. 마치 오늘 한 페이지도 안 읽은 기분이다. 어쩌면 이게 필사의 부작용일까? 앞으로도 필사를 계속하며 나만의 작은 세계를 쌓아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