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일 차 : 역사
종일 흐릿한 날씨의 삼일절을 보냈다. 어제 묵고 가신 손님들의 아침을 준비하며, 손이 부족한 나는 남편에게 아이의 국기 게양을 도와주라고 했다.
"근데 태극기 어디 있어?"
"현관장 쪽 열어봐. 가로로 국기함 누워 있을 거야."
"근데 이거 어떻게 펴는 거야?"
"꺼내서 펴 봐. 방법을 물을 정도는 아니야."
그때 손님이 작년 삼일절에 국기를 달았는데, 저녁에 되어서야 바람에 날아갔었다는 사실을 인지했다고 한다. 누가 다치지 않은 게 천만다행이었다. 남편이 국기 게양을 하고 나서 '안 날아갈 정도로 잘 꽂아 두었'다고 말하고 나서야 나는 착잡해졌다. 남편은 국경일마다 그동안 출근을 하느라고 우리 집 태극기를 처음 만져본 것이었다. 손님이 온 덕에 태극기를 게양해 본 것이다.
"아니, 아들 국기 게양하는 걸 도와주라니까, 왜 얘는 게임만 하고 있고 혼자 그걸 달았어?"
그때 친구분이 "자기가 할 줄 알아야 애를 가르쳐 주지."하고 껄껄껄 웃으셨다.
태극기 게양 후 삼일절이 어떤 날인지 알려주려고 했는데, 나도 밥 차리고 하다 보니 타이밍을 놓쳤다. 아니, 타이밍이 중요한 게 아니라 나 조차도 '대한 독립 만세!'라는 구호와 유관순 누나(?) 노래만 떠오를 뿐이었다.
나도 어릴 때 국기를 생에 한 번밖에 게양하지 않았다. 너무 역사가 잊히는 듯했다. 무관심했다. 공휴일의 의미만 남아버린 '빨간 날'이라는 단어로 통하는 국경일이, 나라의 경사로 지정한 날이라는 걸 아이에게 알려주고 싶었다.
12명의 손님들과 아침 겸 점심을 먹고
영화 <왕과 사는 남자>를 단체 관람하러 갔다. 10살인 아들은 처음부터 잔인한 장면으로 시작되어 쉴 새 없이 긴장감 넘치는 효과음 때문에 자주 자기 눈을 가렸다. 요즘 영화 보는 사람이 늘어나면서 단종의 유배지였던 강원도 영월 관광이 함께 핫해지고 있다고 했다. 영화에서 연기자들의 감정선은 눈물이 헤픈 나를 울음바다로 이끌었다. 중요장면마다 눈을 가린 아들은 엄마가 왜 우는지 알지 못했다.
영화를 다 보고 나서야 조선의 6대 왕조 단종(이홍위)의 존재에 대해 관심이 생겼다. 역사를 알려하지 않은 것에 홀로 부끄러움을 느꼈다. 그 영화는 역사적 기록물에 상상력을 더하여 만든 픽션이다. 단종은 역을 맡았던 박지훈처럼 잘생기거나 호랑이와 대적하지 않았을지라도 작품에 빠져들면서 미화되었을지도 모른다. 영화의 주인공 엄홍도의 캐릭터도 얄팍한 검색으로 봤을 때와 유해진이 연기와는 사뭇 다른 캐릭터다. 나를 포함한 사람들은 역사적 사실을 기반으로 한 영화를 더 몰입해서 보는 경향이 있다. 남은 역사는 몇 줄 밖에 되지 않지만 어차피 상상력이 필요한 영역이라 생각한다. 기왕이면 더 자극적이고 아름다운 이야기로 그리는 것이 민중의 역사에 대한 관심을 끄는데 더 도움이 될 것이다.
삼일절은 1910년 일제 강점기 후 9년 만에 대한민국 국민이 평화적인 시위로 "대한 독립 만세!"를 외친 날이다. 왜 하필 독립이 된 것도 아닌데 '만세'일까. 만세의 의미도 승리의 의미로 잘못 알고 있었다. 숫자 일만, 매우 많거나 끝없이 크다는 뜻의 '만'에, 나이, 세월의 뜻의 '세'가 붙은 만세는 '대한제국의 독립운동이여 영원하라!'는 뜻의 구호였을 것이다. 그런 운동이 일어나서 너도나도 두 팔을 올려 목 터져라 불렀지만 1945년까지 26년간 추가로 일제강점기의 영원할 것 같은 암흑에서 착취를 당해야만 했다. 오늘은 삼일(3.1) 운동이 일어난 지 107년째다. 세계에서는 전쟁이 일어나고 어딘가에선 고통의 신음과 나라와 가족을 잃은 슬픔이 일어나고 있지만 매번 느낀다. 지금 이 시대에 여기 태어나 살고 있다는 것에 대한 감사를 말이다. 조금 있다가 남편이 같이 들을 수 있을 때 아들에게 말해 주어야겠다.
"일본제국이 우리나라를 노예로 삼아서 말도, 이름도 우리나라 것으로 못쓰게 했을 때 1919년에 우리나라 사람들이 '우리나라는 우리 거야!' 하고 외친 게 '대한 독립 만세'야. 사람들이 잡혀갈 걸 알고 무서워도 우리나라를 되찾겠다고 말한 거라서 지금까지 기념하는 게 삼일절이야."
겉으로는 변함없이 일본의 식민지였지만 마음속으로는 우리나라에 대한 확신과 자부심을 놓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도 그걸 잊지 말아야 한다고 알려줘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