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일 차 : 기다림
남편이 외식업체에 있다 보니 이런저런 얘기가 들린다.
"우리 매장 근처에 새로 생긴 음식점 하나가 있는데, 항상 웨이팅이 있어.
가보면 텅텅 비워났어. 마케팅이지. 캐치테이블이며 테이블링 들어가 보면 일부러 줄을 세워."
"브레이크 타임인 거 아니야?"
"아침부터 저녁까지 브레이크 타임이냐?"
남편의 주장으로는 20억 가까지 창업 비용을 들였을 규모가 있는 음식점에서 홍보효과를 위해 대형 마케팅 업체와 손을 잡고 초기 손해를 감수한다는 것이다. 일부러 스무 테이블이 넘는 자리 중에 세 팀 정도만 받고 몽땅 '대기연출'을 한다니. 줄 선 사람들이 바보도 아니고 저기 자리가 저렇게나 많은데 왜 손님을 안 받냐고 항의할 텐데, 그런 배짱 장사를 할 수 있다고? 하긴 잘 둘러대기 나름이겠다. 재료 소진이라 할 수도 있을 거고, 주방 처리량이나 직원 수 부족, 서비스의 질이 나빠질까 우려된다고 얘기하면 될 테니까.
경험상 초기 패밀리레스토랑이 아니고서야 감동적인 서비스 응대를 받는 일은 많지 않았다. 남편의 얘길 듣고 보니 지난해 초여름에 경험한 대기연출이 떠올라 약이 올랐다. 업무지구에 면접을 보러 가는 길에 시간이 좀 남아 오랜만에 지하 음식점이 가득 들어선 건물의 콩국수를 먹으러 갔다. 거의 10년 만의 방문이라 지하음식점들 사이에서 방향을 잃었을 때 긴 줄이 보였다. 여의도는 점심시간이 되기 전부터 줄을 많이 선다는 걸 뜨악한 심정으로 보며 줄 선 사람 중 하나에게 물었다.
"여기 ○○○이 어디로 가야 되는지 혹시 아세요?"
"이게 그 집 줄이에요."
"이게요?"
줄의 끝은 보이지 않았다. 면접 전에 콩국수를 먹지 못할 것 같아 아쉬움을 뒤로하고 나오는 길에 한산한 '칼국수집'이 보였다. 칼국수집 문쪽에 내가 가려던 식당과 비슷한 비주얼의 '콩국수 사진'이 붙어 있었다. 큰 기대를 안 하고 들어가서 바로 앉았는데, 모방업소 콩국수 치고는 내가 먹고 싶은 그 맛과 많이 닮아서 만족도가 높았다.
몇 주 뒤 줄이 길었던 그 집에 친구와 함께 갔다. 친구는 유료 주차장에 자리를 겨우 찾아 주차를 했다. 늦은 점심으로 오후 3시쯤에 갔다. 브레이크 타임이 없었지만 줄이 여전히 길었다. 점심시간도 아닌데 40분 이상 기다렸다. 얼마나 맛있는지 두고 보자는 마음으로 긴 줄 끝에 섰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허기는 때를 놓쳐서 덜 배고파질 지경이 되고 있었다. 문짝에는 '블루리본 서베이(Blue Ribbon Survey)' 마크가 10개 넘게 붙어있는 게 눈에 띄었다. 괘씸한 것은, 매장을 확장해 놓고 그쪽 별관은 아예 불 끄고 문을 닫고 있었다. 직원이 교대로 쉬는 시간이었을 수도 있겠지만, 이렇게 사람들이 많이 기다리는데도 한가하게 한쪽 관만 받고 있었고, 그마저도 빈 테이블이 3개나 보였다. 우리는 2명이라서 비어 있는 4인 테이블을 지나 좁디좁은 2인 테이블로 안내되었다. 우리 뒤로도 우리가 처음 왔을 때처럼 긴 줄이 있었다. 어찌나 배신감이 느껴지던지. 저 맨 끝의 고객도 40분 이상 기다려 도착한 이곳에 텅텅 비워 불끈 별관과 블루리본 마크들, 그리고 몇 테이블 빈 것을 보게 될 테지.
40분 이상 줄 서서 먹은 추억의 콩국수 맛이 어땠을까. 그렇게 기다려야 할 정도는 아니었다. 게다가 당연하겠지만 모방업소 콩국수보다 얼마 더 비쌌다. 분명 맛은 10년 전과 같겠지만 이미 배고픔이 절정을 달했을 때 오기로 줄을 섰고, 나중엔 화가 났다. 아무 의심 없이 공정한 줄 서기에 가담했지만 그 끝에는 내 소중한 시간을 마케팅에 이용당한 느낌이 자리하고 있었다. 차라리 저번에 줄 안 서고 먹었던 그 칼국수집에서 곁들여 팔던 콩국수를 먹는 게 나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기다림을 무척이나 싫어 한 나는 웬만해서는 맛집 앞에 오랫동안 줄 서지 않고, 동네 의원도 줄이 적은 곳을 단골 삼는다. 내 생에 즐거운 기다림은 없었을까? 있었다. 정말 감동적인 기다림, 기꺼이 기다리기 위해 갔던 음식점도 있었다. 고등학교 3학년 때 친구들과 번화가의 줄 많이 서는 '카페'에 간 적이 있다. 밥과 후식까지 모두 한 곳에서 해결 가능한 곳이었다. 저녁이나 주말에는 기본 대기시간이 30분에서 1시간 정도였지만 우리는 기꺼이 기다렸다. 매니저라고 자신을 소개한 사람이 우리가 기다리는 동안 자리에 앉기까지 얼마나 더 기다리면 될지 중간 안내를 해 주었고, 대기시간 40분이 넘어가면 파르페나 고급 주스를 대기석에서 먼저 드시라고 서비스로 주기도 했다. 본격적인 식사가 시작되기 전에 감동의 배부름부터 경험하고 시작해서 한동안 충성고객이 되었던 기억이 난다. 돈가스나 파스타 등의 본메뉴를 먹고 나면 셰이크나 주스류, 카페모카 등의 후식 음료 메뉴가 무료 제공되었다. 후식을 다 먹으면 다시 후식이 시작되었다. 혹시 더 필요한 음료가 없는지 물으며 메뉴판을 다시 우리에게 내밀었다. 놀랍게도 배가 터질 지경이 되어 우리가 먼저 항복을 하고 나올 때까지 '무료 음료'가 두 번이고 세 번이고 계속 제공되었다. 우리 같은 손님만 받으면 분명 적자였을 거였겠지만, 한참 많이 먹는 나이의 학생들만 오는 곳이 아니었으므로 가게는 더욱 번창했고, 모방업소들도 생겨났다.
마케팅이 가끔 치가 떨릴 때가 있다. 대기어플에서 봤을 때 이 지역 1위 업소라던가, 대기 현황을 보이게 해 두면 '여기가 맛집인가 봐' 하는 사회적 증거 효과인 것처럼 보이지만, '소문난 잔칫집에 먹을 거 없더라'는 생각이 들 때도 심심찮게 있었다. 겉으로는 공정한 시스템처럼 보이지만 요식업계에서 일부러 개업할 때부터 대기연출을 위해 공 대기 50팀을 세워 두는 경우도 있다고 하니 소비자로서 황금 같은 시간을 우롱당하는 기분이 든다. 이래서 더욱 유튜브 요리 채널이 더 번창하는 건지도 모르겠다. 줄 설 바엔 어느 유튜버가 공개한 레시피대로 직접 만드는 게 빠를지도 모르니까. 기다림은 더 이상 마케팅이 되어서는 안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