쫓기던 시간에서 살 길은

63일 차 : 시간

by 나예스

똑같은 24시간이 주어지는데 누군가는 쫓기고, 누군가는 흘려보내고, 누군가는 밀도 있게 쓴다. 그 모든 순간의 누군가는 바로 나다.


을 좇거나 시간에 쫓기지 않는 사람이 되고 싶다, 고 생각하는 이유는 쫓고 쫓긴 대상이었기 때문이다. 생산성의 함정에 빠져서 해야 할 일의 리스트를 적다 보면 하루가 끝났을 때 반절도 끝내지 못한 객관적 지표를 보며 자책하곤 했다.

"아직 이것도 못했는데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되었네."

할 일을 따라가다 보면 시간이 부족하고, 여유가 없다 보니 열심히 사는데도 삶이 크게 나아지는 것 같지가 않았다. 입구가 좁은 항아리 속의 보석 한 줌을 잡고 손이 빠지지 않는다고 고통스러워하는 꼴이었다. 시간이 남아서 쉴 시간이 생겼다고 잠시 기뻐하던 마음은 어느새 시간이 남으면 쉬겠다는 전략이 되고 말았다. 내 쉼, 내 행복을 자꾸 마지막으로 미루는 패턴은 현재를 불행하게 했다.


시간의 여유는 '잘하기'를 포기하고 나면 찾아왔다. 모든 걸 내가 쥘 수 없음을 인정하고 내가 해낼 수 있는 몫만 적당히 하고 나면 시간도 마음도 여유가 생겼다. 애써 멍 때리고 쉬어 봤다. 시간은 훅 지나갔지만 내 삶을 꼼꼼히 들여다보게 되었다. 예전에 시시하게 여기던 것에 의미 부여를 하고, 일상의 소소한 기쁨을 누렸다. 어항 속 수초의 성장을 지켜보고 남매 중 한 마리만 살아남은 아기 구피를 응원하고, 베란다 화초를 가꾸고 그 앞에 의자와 테이블을 가져다 놓고 앉아서 커피 한잔을 내려 마시고.

"쉬니까 이렇게 좋은 거구나."


그러나 기쁨이 오래오래 가지는 않았다. 뭘 잘하고 나서 쉬면 쉴 때의 마음이 뿌듯했지만, 대충 적당히 하고 그저 그런 결과물을 만들고 또 쉬니 자괴감도 들었다. 이대로 가면 망할 것 같은 느낌이랄까. 나는 '현상 유지'를 하기 위해 하루를 살고 싶지 않았다. 이제 쉬었으니 노를 저어 앞으로 나아가고 싶었다. 마치 휴게시간이 끝나고 다시 일을 해야 하는 근로자처럼. 내가 이만큼 할 수 있는 사람인데 요만큼만 하기보다는 그 반대가 되어야 사는 게 의미 있게 느껴졌다. 유한한 삶을 살면서 그 끝나는 때를 모른 채 흘러가는 시간이 아까워졌다. 뭔가를 더 해야 할 것 같은 느낌이 다시 찾아왔다. 잠을 줄여 미래를 위한 역량을 쌓고, 쪽시간에 책을 펴고, 루틴에 분초를 매겼다. 그러니 이제는 건강과 체력이 따라주지 않았다. 시간과 도대체 어떻게 싸워서 이겨야 하나.


가수 악뮤의 <물 만난 물고기>라는 노래에 이런 가사가 나온다.

'우리가 노래하듯이, 우리가 헤엄치듯이 살길'


하나의 작품이 된 죽음의 풍경을 노래하다가 느닷없이 튀어나와 노래의 끝을 장식하는 후렴구라 계속 해독하지 못한 채 마음속에 남았다. 이찬혁의 소설 <물 만난 물고기>를 읽어봐도 이 후렴구의 연관성을 모르겠다. 하지만 오늘은 이 노랫말을 '시간'과 연관 지어 생각해 보려고 한다.


물속의 물고기, 시간 속의 나. 나는 한 마리의 물고기에 지나지 않는다. 물고기라는 학명은 존재하지 않는다니 '바다생물'이라 말해도 좋을 것이다. 물고기가 바다와 싸워서 이기려는 게 무모한 일이다. 무한한 시간이란 바다를 태평양이니 호르무즈 해협이니 구분 짓지도 말고 노래를 흥얼거리듯이 시간을 잊고 리듬에 빠져보고 싶다.


시간을 의식하며 버둥거리는 게 아니라 파도의 방향을 보면서 헤엄을 칠 줄 아는 것이 바로 시간 안에서 '살 길'이라고 들린다. 시간은 바다라서 쫒거나 붙잡거나 지배하는 게 아니라, 잊어야 편안한 헤엄이 된다. 지금은 내 파도의 방향이 글쓰기이다. 아직은 숙제를 하듯 쓰고 있지만 시간을 잊을 정도로 글쓰기에 몰두하고 싶다. 물고기도 비록 눈은 뜨고 있지만 자는 시간이 있다. 잘 자고 글쓰기도 잘 즐기는 것, 종일 사유하며 자유롭게 시간 안에서 헤엄치는 것, 그게 내가 살 길이라는 생각이 든다.

물고기 총동원된 오늘의 풍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