벚꽃이 필 때, 지난해의 벚꽃을 기억하는 것도 좋다

64일 차 : 벚꽃

by 나예스

봄에 가장 환영받는 꽃으로 벚꽃이 있다. 봄과 벚꽃이 마블링 된 노래가 카페마다 울려 퍼지면 일주일 사이에 봄비가 꽃잎을 떨굴까 노심초사하며 급히 찾아가보게 된다. 4월에 벚꽃이 피면 너 나 할 것 없이 핑크빛 그늘 아래로 모여든다. 여의도 윤중로까지 갈 것도 없다. 작년에 집 근처로 벚꽃을 보러 가겠다고 일정 잡은 전날 비가 와서 꽃잎이 상당히 떨어졌다. 비가 그치고 급히 아들과 자전거를 몰았다. 날이 춥고 흐려서 그런지 벚나무 거리에 아무도 없었다. 해마다 벚꽃 구경을 한 게 아니었는지도 모르겠다. 벚꽃을 보러 온 사람이 사진 찍는 풍경을 구경을 해왔는지도. 꽃잎은 휴지의 한 겹보다 얇다. 소리 없는 꽃비가 살랑살랑 내릴 때 행인 없이 우리만 있으니 어쩐지 쓸쓸해졌다.


벚나무는 일제강점기부터 일본 정신의 상징으로 조선 곳곳에 심겨졌다. 그러나 너무나 예뻐서 조경수로 인기도 많고 축제까지 치른다. 당장에 거리에서 봐도 우듬지가 몽땅 잘려 나간 흉한 플라타너스나 가을마다 지뢰밭이 되는 은행나무에 비해 얼마나 아름다운가. 크기도 다양하다. 벚나무 뿌리가 보도블록을 들어 올릴 정도로 오래된 둥치가 있는 거리부터, 신축 아파트 1층 창문이 반쯤 가리는 크기의 벚나무들까지. 도시마다 집에서 조금만 나가도 흔히 볼 수 있다. 국화인 무궁화나무가 무색하다. 무궁화는 점점 자취를 감추어 접시꽃을 보고 무궁화인줄 아는 사람도 있다 보니, 이러다 천연기념물이 되는 건 아닐까 하는 우려가 생길 지경이다.


보통 꽃이라는 것은 열매를 맺기 위해 핀다. 얼마나 예쁜 꽃을 피우느냐는 얼마나 많은 곤충을 유인하느냐 하는 생존의 문제다. 그렇게 수정이 된 다음에는 어떻게 되나. 우리의 벚나무는 겨우내 비축한 양분으로 꽃에 너무 힘을 주었는지 초여름에 달린 부실한 열매가 처연하다. 겨우 새 먹이 정도가 된다. 그래도 새가 먹으면 멀리멀리 씨를 퍼뜨려 줄 것이다. 체리도 과일로 개량된 종이라 열매가 크고 순한 맛이 나고, 벚나무의 열매도 꽃을 더 예쁘게 피우기 위해 개량하다 보니 씨 없는 수박처럼 아예 버찌가 안 열리는 종도 있다.


벚꽃은 뭘 위해 그렇게 화려하게 꽃을 피우고 사라지는 걸까. 365일 중에 단 7일만 눈부시게 빛난다. 마치 너무 일찍 남들보다 고된 연습을 하고 나서 폭발적인 인기를 끄는 아이돌 같다. 어떻게 저 이른 때에 저렇게까지 빛나지, 너무 멋있고 예쁘다. 꽃잎이 진 자리에 초록색 잎사귀가 듬성듬성 비집고 나오면 완전히 관심 밖이 된다. 봄이 끝나고 나면 그 나무가 벚나무라는 사실을 까마득히 잊게 된다. 연두색 새싹이 나서 봄을 좋아하는 나도 벚나무만큼은 연분홍색이 스친 자리에 올라오는 연두색을 홀대하게 된다. 다른 여름꽃에 눈을 돌리게 된다. 가을 단풍철에 단풍잎과 은행잎을 황홀하게 바라보다가 톱니 같은 타원의 노란 잎이 하나 쓱 떨어지길래 보면 벚잎이다. '저도 노랗게 물들었어요.'하고 소심하게 알려주듯이. 여름 내도록 잊고 있던 존재. 용이 못된 이무기처럼 체리가 되려다 채 못 된 버찌(벚)가 달리는 나무였다. 버찌가 언제쯤 얼마나 열매 맺는지 관심도 없다가 노란 잎이 떨어지면 그제야, '아 벚나무였지' 하게 된다.


화려한 등장으로 온 세상을 들뜨게 만들다가 잊히는 존재가 된다는 건 쓸쓸한 일이다. 그래서 너무 이른 성공은 독이라고도 한다. 인생에서도 이른 시기에 부유한 환경에 살다가 생계가 막막해지면 그 불행감이 더 클 것이다. 인간은 큰 집에 살다가 평수 줄여 이사가 기는 싫은 것처럼, 자신이 누렸던 좋은 환경의 최대치 밑으로 내려가면 불행을 느끼게 마련이니까. 벚꽃처럼 스타가 되었다가 잊히는 게 아니라 순차적으로 점점 더 좋아지는 삶에서 안정감을 느끼고 싶다. 작가의 삶으로 보면 베스트셀러 이후 잊히는 것보다 세월을 타지 않는 스테디셀러를 내는 사람이고 싶다.


벚나무도, 벚꽃이 나에게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아 있다. 벚꽃이 만개하는 시기가 아니라도 눈길을 주고 기억하고 싶다. 오늘은 한때 내가 너무 좋아했던 노래들을 다시 찾아 듣는 날이다. 그들의 열매가 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