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살까지만 해도 결혼은 내 인생에 없을 거라 믿었다. 나는 아주 어렸을 적부터 엄마에게서 “여자가 능력이 되면 혼자 살아야 해.”, “결혼은 여자가 손해 보는 짓이야.” 같은 말을 자주 들으며 자랐다. 그 말들은 어린 내 마음속에 깊이 뿌리내렸다. 그래서 결혼하지 않고 살아가는 삶이야말로 단단한 사람이 되어가는 길이라고 생각했다.
나의 부모님은 내가 초등학교 2학년이 되던 해에 이혼하셨지만, 우리 집은 내가 태어나기 훨씬 이전부터 화목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아버지는 집에 자주 들어오시지 않았고, 어쩌다 들어오실 때면 언성을 높이곤 했다. 초등학교를 들어가기 전까지만 해도 나는 그 모습들이 일반적인 가족의 모습일 거라고 생각했다.
내가 이해한 '가족'의 모습이란, 거실 가득 흩어진 파편들 속에서 언니와 꼭 끌어안거나, 난데없이 엎어진 밥상에 빨갛게 데인 다리를 붙잡고 눈물을 삼키거나, 몇 시까지 돌아오지 않으면 신고하라며 112를 알려주고 아빠에게 끌려나가던 엄마의 뒷모습 같은 것들이었다.
엄마는 태풍이 한바탕 휩쓸고 지나간 다음 날이면 나를 한동안 앉혀 놓고, 엄마의 고단한 삶에 대해, 엄마의 유일한 희망이 나라는 것에 대해 이야기하곤 했다. 그런 얘기를 들을 때면, 나는 엄마가 결혼한 삶을 싫어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내가 어른이 되어 돈을 많이 벌면, 엄마랑 둘이 살며 호강시켜 주겠다고 새끼손가락을 걸어 약속했다. 하지만 엄마는 아빠와 이혼한 지 채 2년도 되지 않아 재혼하셨고, 엄마의 재혼을 통해 세상의 모순에 대해 처음으로 배우게 됐다.
부모님의 이혼 후 아빠, 언니와 살고 있던 나는, 엄마의 재혼으로 새로운 가족과 잠시 함께 살게 되었다. 8개월. 그 시간은 내 인생에서 아주 짧은 시기였지만, 나의 유년 시절 중 가장 강렬하게 남아 있는 시기이기도 하다.
새아버지를 처음 만나던 날, 초인종을 누르려던 엄마는 뒤돌아서서 나를 보더니 '아빠'라고 부를 수 있는지 물었다. 선택지는 없었다. '아빠'라고 불러야만 문을 열고 엄마가 나를 데려갈 것만 같았으니까. 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인 뒤, 수차례 입으로 '아빠'를 되뇌었다. 아침까지만 해도 잘 쓰던 단어였는데 도통 입이 열리지 않았다. 고민 끝에 나는 마음속으로 '새'를 삼킨 뒤 '아빠'라고 말했다.
새 가족과 살게 되자 엄마는 나에게 흠잡히지 않도록 행동거지를 잘해야 한다고 당부했다. 그래서 나는 한동안 예의 바르고 착한 아이인 것처럼 행동했다. 하고 싶지 않은 말을 해야만 했고, 하고 싶은 말은 할 수가 없었다. 그건 엄마의 부탁이기도 했지만, 내가 그곳에서 생존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기도 했다. 그럼에도 함께 살던 새아버지와 새 할머니의 눈빛에서 노력해도 가까워질 수 없는 거리를 느꼈다.
학교생활도 쉽진 않았다. 내가 전학 간 학교는 한 학년에 한 반뿐인 작은 시골 학교였다. 4년 내내 같은 반이 되어 전교생의 숟가락 개수까지 아는 사이에서, 나는 낯선 이방인이었다. 전학 온 순간부터 친구들은 나에게 '6학년이던 새 오빠와 성이 왜 다른지', '왜 갑자기 동생이 나타난 건지' 물어봤고, 머지않아 짓궂은 친구들은 새아버지의 성을 붙여 나를 부르곤 했다. 11살의 나는 학교에서도 집에서도 기댈 곳이 없었다.
8개월 후 나는 도로 아빠에게 맡겨졌다. 엄마에게 물어보진 않았지만, 새 가족들이 날 바라보던 눈빛들을 통해 이유를 짐작했다. 아빠에게 다시 돌아온 것은 분명 더 나은 삶이었겠지만, 원래 살던 곳으로 오게 된 것이 화근이었다. 이전에 다니던 학교를 다시 다니게 되자, 나는 부담스러운 관심을 받게 되었다. 아이들은 나에게 '왜 다시 돌아왔는지' 물어봤고, 질문이 이어질수록 나는 점점 더 말없는 아이가 되어갔다.
외로움 끝에 전학 다녀오기 전 단짝이던 친구에게 다가갔을 때, 그 친구로부터 "너희 집 이혼했다며? 우리 엄마가 너랑은 놀지 말래."라는 말을 들었다. 그 뒤, 나는 되돌아온 학교에서도 마음의 문을 완전히 닫았다. 그리고 아주 오랫동안 홀로 시간을 보냈다. 학년이 바뀌어 선생님께 도움을 요청한 적도 있었지만, 되레 받은 상처가 더 컸다. 이 시기를 통해 나는 이혼 가정의 자녀가 받게 되는 고통에 대한 깊은 이해의 시간을 가졌다.
그 상처의 나날들은 나에게 꿈이 되었다. 내가 선생님이 된다면 나와 비슷한 어려움을 겪는 학생들을 내 경험을 바탕으로 이해해 줄 수 있을 것 같았다. 어릴 적 나는, 오랜 시간 외로움 속에서 나를 이해해 주는 어른을 만나고 싶었으니까.
내가 나의 진로 계획을 말했을 때, 가족들도 내가 교사가 되는 것에 대해 별다른 말은 없었다. 교대의 등록금은 아버지의 기준에 합리적이기도 했고, 당시 여자가 가질 만한 안정적인 직장으로는 교사만 한 것이 없다고도 했다. 그렇게 나는 초등학교 교사가 되었다.
"만나는 사람은 있니? 결혼 생각은 없고?"
당시에는 20대 후반에 결혼을 많이 했다. 교직생활을 이어가던 나에게도 혼기가 가까워졌음을 의미했다. 어느 순간부터 명절에 모일 때면 친척들로부터 질문이 쏟아졌다. 언니의 결혼 이후, 다음 타자인 내게 시선이 쏠리기 시작한 것이었다.
한사코 손사래를 치던 내게 작은 어머니는 지인의 지인이라며 부담 없이 만나볼 것을 권유했다. 몇 해 동안 거듭된 권유였다. 나는 마지못해 '소개팅이 잘 되든 안 되든 앞으로 더 이상 권유하지 않겠다.'는 다짐을 받아내고 약속을 잡았다. 그렇게 마련된 자리에서 지금의 남편을 만났다.
남편과 결혼을 할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던 날이 기억난다. 누군가 얘기하던 종소리가 들린다거나 한 건 아니었다. 교제를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진지한 만남을 전제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 나에게 부모님의 이혼 사실은 낙인 같은 것이었고, 상대에게 알리고 풀어야 할 매듭이었다.
함께 공원을 산책하던 어느 날, 나는 주절주절 나의 오랜 아픔에 대해 얘기했다. 아주 긴 이야기였다. 우리가 만난 기간에 비해 다소 무거운 주제이기도 했다. 그 이야기가 끝날 때까지 그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단지 내 이야기가 다 끝나고 나서야, 꽁꽁 얼어 있던 내 손을 잡아주었다. 그 손이 참 따뜻했다. 비로소 '나, 이 사람이랑 결혼하겠구나.' 싶었다. 그렇게 우리는 결혼하게 되었다.
그러나 결혼 이후에도 아이를 가져야겠다는 생각에 이르기까지는 생각보다 더 많은 시간이 걸렸다.
-계속-
[매주 목요일 업데이트 예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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