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님은 애 안 낳아?"
회의를 마친 후 바로 일어설걸 그랬다. 손주의 사진을 자랑하던 A가 나에게 던진 화두였다. 순간 동료 선생님들의 시선도 일제히 나를 향했다. 어쩌다 대화의 중심이 나로 넘어오게 된 걸까? 난 그저 말없이 옆에 있었을 뿐이었는데.
"아직은 생각이 없어서요."
잠시 망설이다가 '예, 아니오.'대신 애매한 대답을 택했다. '예.'라고 하면 이유를, '아니오.'라고 하면 계획을 물을 것 같았다. 무엇이 되었든 굳이 설명할 관계는 아니었다. 잠시 A의 시선이 내 얼굴을 훑고 지나갔다. 기분이 불쾌했다.
"요즘 사람들은 애를 왜 안 낳나 몰라."
아, 어차피 설명한다고 이해할 사람은 아니었구나. 목례를 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남아 있던 동료들은 잠시 눈짓을 주고받더니 A와 대화를 이어 나갔고, 나는 교무수첩을 챙겨 교무실을 나섰다. '요즘 사람들은 복에 겨웠다'며, '자신의 신규 교사 시절에는 지금보다 아이 키우기가 훨씬 어렵고 힘들었다.'는 A의 말이 교무실 문을 닫는 순간까지도 내 귀에 들렸다.
A에게 나는 까마득한 후배였고, 요즘 사람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이토록 무례해도 된다는 의미는 아니지 않을까. 나는 요즘 사람들이 왜 아이를 안 낳는지는 모르지만, 당시의 나는 아이를 낳지 않아야겠다고 생각했다.
나와 남편은 공무원과 대기업 조합 맞벌이 부부이고, 지방의 중소도시에 터를 잡았다. 둘이 벌어먹고살기에 넉넉하지는 않았지만 팍팍하지도 않았다. 키우기로 마음만 먹는다면 둘이서 아이 하나는 키울 수 있지 않을까. 부모님의 경제적 지원이나 물리적 도움을 기대한 것은 아니었다. 세상에 공짜 점심은 없고, Give and take라고 하지 않는가. 부모님의 경제적 지원을 받을 수 있는 여건도, 물리적 도움을 기대할만한 거리도 아니었다.
덕분에 결혼도 우리 하고 싶은 대로 했고, 아이에 대한 압박을 받은 것도 없었다. 결혼 후 5년이 넘도록 우리를 배려해 단 한 번도 아이 계획을 물어보시지 않으셨던 시부모님을 둔 덕도 있었다. 우리에게 있어서 아이는 오롯이 우리 둘이 결정하면 될 문제였다.
"여보, 여보는 아이를 갖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
"있어도 좋고, 없어도 좋다고 생각해. 여보는?"
"나도. 지금도 충분히 잘 살고 있잖아."
충분했다. 내 삶에 이렇게 행복한 시간들이 있어도 되나 불안할 만큼 행복했다. 지금도 충분한데 무언가를 더 바라는 것은 욕심이라는 생각도 들었고, 내 선택으로 인해 태어난 존재가 이 세상을 살아가며 겪어 갈 고통에 대해서도 걱정이 됐다. 자신이 택하지 않은 삶에 대해 혹시나 나를 원망하진 않을까 두려웠다.
아이들을 좋아해 교단에 섰다. 10여년간 교직에 근무하며 알게된 것은 아이들은 생각보다 더 많은 것을 고려해야 한다는 사실이었다. 무엇을 좋아하는 것과 책임을 진다는 것은 별개의 일이다. 아이들의 인생에 있어 유일한 1년을 교육해 나간다는 것에 대한 책임감은 충분히 느끼고 있었다. 교단에 서는 하루하루가 행복했지만, 아슬아슬한 외줄 타기를 하는 듯 버겁기도 했다. 그런 나에게 '내 아이'라니. 그저 교사–학생처럼 1년을 만나는 사이가 아니었다. 그러니 그 책임을 마주할 자신은 더더욱 없었다.
아이들은 손이 많이 간다.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것도 모른다. 나는 교직 생활의 대부분 초등학교 1학년 학생들을 맡았는데, 학생들을 지도하며 '이 세상에 당연한 것은 없다.'는 걸 다시 한번 깨달았다. 인사하는 법, 젓가락질하는 법, 양치질하는 법, 신발 신는 법, 손 씻는 법... 다 나열할 수도 없을 만큼, 어느 것 하나 교육 없이 저절로 되는 것이 없었다.
그건 보호자로부터의 ‘교육된 상태’를 이어받는 바통 터치이긴 했지만, 어느 정도 보호자의 일상을 체험할 수 있었다. 나는 그들의 삶을 가까이서 보며, 자녀를 둔 부모가 마주하는 수많은 고민과 어려움을 간접적으로 체험했다. 요즘 아이를 낳고 기르는 보호자들은 대부분 교육에 관심이 많았고, 아이에 대한 애정도 깊었다. 그들을 존경했지만, 내가 할 엄두는 나지 않았다.
나는 부모의 양육환경과 방식이 아이에게 만들어내는 차이를 매일같이 마주했다. 간혹 보호자의 케어를 잘 받지 못하는 아이들은 교실에서 티가 났다. 비싸고 좋은 옷을 입지 않아서 티가 나는 것이 아니었다. 그림일기를 볼 때나, 간간히 나에게 속삭이는 대화나, 어른을 대하는 태도에서 티가 났다. 나는 그 차이를 다른 아이들이 느끼지 않을 수 있도록 부단히 노력했다. 적어도 내가 운영하는 교실 안에서는 가정환경이 영향을 주지 않고, 오롯이 자기 행동으로서 책임지고 성장할 기회를 주고 싶었다.
그런 점에 있어서는 잘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는 유년 시절에 지독히 예민했고, 보호가 필요한 가정환경에서 자랐으니까.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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