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종종 누군가의 언어를 비판할 때, 그 언어가 어떤 전제 위에서 만들어졌는지를 놓친다. 그리고 그 순간, 논쟁은 사실을 향하지 않고 태도를 향하게 된다.
최근 나는 한 가지 흥미로운 시선을 접했다. 사람들에게 방향을 제시하는 글, 구조를 설명하는 글, 그리고 어떤 가능성을 말하는 언어가 오히려 인간을 단순화하고 현실을 왜곡한다는 주장이다.
이 주장은 일정 부분 타당하다. 현실은 복잡하고, 삶은 변수로 가득하며, 어떤 공식도 모든 경우를 설명할 수는 없다. 그 점에서 단순한 해답을 제시하는 태도는 언제나 경계되어야 한다.
그러나 여기서 한 가지 질문이 남는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 현실을 살아가는 사람은 완전한 진실 위에서만 움직이지 않는다. 때로는 불완전한 정보 위에서 결정을 내려야 하고, 때로는 확률에 기대어 방향을 선택해야 한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사람은 스스로를 지탱할 수 있는 하나의 구조를 필요로 한다.
나는 그 구조를 ‘정답’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다만, 현실 속에서 반복적으로 작동하는 하나의 방식이라고 말한다.
어떤 이들은 그것을 위험한 단순화라고 부를 수도 있다. 그러나 단순화 없이 인간은 아무것도 시작할 수 없다. 과학이 가정을 통해 세상을 설명하듯, 인간 역시 제한된 정보 속에서 자신의 길을 설계한다. 문제는 구조 자체가 아니다. 문제는 그것을 절대적인 것으로 오해하는 태도다.
따라서 우리가 경계해야 할 것은 ‘구조를 제시하는 행위’가 아니라 ‘구조를 맹신하게 만드는 방식’이다. 나는 사람들에게 하나의 길만을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다만, 각자가 자신의 길을 설계할 수 있도록 돕는 틀을 제시할 뿐이다.
그 틀은 누군가에게는 맞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누군가에게는, 지금 당장 한 걸음을 내딛게 하는 이유가 될 수 있다. 삶은 이론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삶은 선택과 실행 속에서 만들어진다. 그 실행의 현장은 언제나 구체적이다.
얼마나 남았습니까.
그 질문은 단순한 정보 요청이 아니다. 그것은 지금 이 길을 계속 가도 되는지에 대한 확인이며, 포기하지 않기 위한 작은 신호다. 그래서 누군가는 대답한다.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그 말이 정확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 말이 한 사람을 다시 걷게 만든다는 사실이다. 나는 그런 언어를 부정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이 인간이 서로를 지탱하는 방식이라고 생각한다.
정상은 하나일지 모르지만, 그곳에 도달하는 방식은 같지 않다. 올라가며 체력을 나누고, 서로에게 길을 묻고, 때로는 멈춰 서야 했던 사람에게 정상은 단순한 지점이 아니다. 그렇게 올라온 사람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풍경은 지나온 고통의 보상이고 시간의 총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