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의 처음을 응원하며
토요일 오후 10시 24분.
하루 종일 미루고 미루다 노트북을 켰다. 밖은 희끗희끗 비가 온다고 하는데 밖에 나가보질 않아서 알 수가 없다. 하루 종일 몸과 마음에 돌덩이가 내려앉은 듯 무거웠다. 다음 주부터 내가 진행해야 하는 3개월짜리 큰 프로젝트가 시작되는데, 아직 킥오프* 준비를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자료를 만들어야 하는데, 어떻게 발표할지 생각해야 하는데…. 걱정은 한가득한데 이런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몸은 소파에 축 늘어져 있었다. 움직일 생각도 하지 않았다. 그 와중에 뭐라도 해야겠다 싶어 일어나면 평소에 잘하지 않던 일들이 하고 싶었다. 왠지 냉장고도 청소하고 싶고, 쿠키도 굽고 싶고, 글도 쓰고 싶은 것이다. 10시 24분이 넘어가는 지금도 꾸역꾸역 컴퓨터를 켜놓고는 이렇게 글을 쓰겠다고 앉아있다. 정말 하기 싫은가 보다.
나를 잘 아는 사람들도 잘 안 믿는 사실이 있다. 내가 발표를 지나치게 무서워한다는 것이다. 보통 활발한 사람들은 잘 안 떤다고 생각하는데, 그렇지 않다. 사람들 앞에서 무엇인가를 이야기할 때, 특히 뭔가를 진행하거나, 의견을 내야 할 때 나는 온몸이 떨린다. 잘 모르는 사람들 앞에서 자기소개를 할 생각만 해도 덜덜 떨리고, 말은 시작도 하지 않았는데 숨소리부터 추운 날 밖에 나온 사람처럼 호들호들 거린다.
그런데 이직하고부터는 직급이 높은 사람들 앞에서 발표하거나 의견을 이야기할 일이 많아졌다. 한국계 회사에서는 팀장님과 먼저 이야기된 것이 아니면 보통 높은 사람들 앞에서 내가 직접 말하는 일은 없었는데, 여기서는 내가 말을 해야 할 것 같으면 해야 한다. 말을 하지 않는다는 것은 마치 아무것도 모른다고 이야기하는 거나 다름없다고 했다. 하지만 말을 하려고 할 때마다 호들호들 떨리는 건 어떻게 해야 할까. 다음 주에 많은 사람 앞에서 진행해야 하는 프로젝트는 어떻게 하면 좋을까. 청심환이라도 먹어야 하는 게 아닐까. 보통의 발표도 무섭지만, 처음은 더더욱 무섭다. 망칠 것 같은 불안감과 잘하고 싶다는 의욕이 뭉쳐 나를 삼킨다. 처음에 대해 생각하다 보니 문득 2016년 첫 공장투어가 떠오른다.
2016년 사회생활을 처음 시작했을 때의 나는 지금보다 영어를 더욱 잘하지 못했다. 영어로 일을 한다고 하면 친구들이 '니가?'라고 되물을 때였다. 그런데 입사했더니 '글로벌) 해외지원팀'이라는 팀이 아닌가. '글로벌'과 '해외'라는 같은 단어가 교묘하게 두 번이나 들어간 팀이었다. 그 팀에서 나는 해외고객이 제품에 대해 기술적인 문의를 해오면 답변해 주고, 공장에 오면 공장을 돌며 안내해 주는 업무를 맡았었다. 문제는 공장투어도 모두 영어로 해야 한다는 것. 장장 2시간 30분 동안 공장의 모든 라인을 돌며 회사와 생산제품에 관해 설명하고 질문에 답변해야 했다. 영어 리스닝과 함께하는 점심 식사는 덤.
처음 2~3번 정도 선배가 하는 투어를 따라다녔었는데 죽어도 못하겠다 싶었다. 길을 안내해야 했는데 나는 집 앞의 길도 잘 못 찾는 길치였고, 영어로 해야 하는데 영어로 질문조차 잘 못하는 영어 바보였으며, 전력기기의 원리부터 라인 공정 하나하나까지 전부 알아야 하는데 입사한 지 이제 한두 달 된 전기의 'ㅈ'도 모르는 전기 바보였다. 유창한 선배의 발표를 보며 어떻게 저렇게 다 알고 대답을 할 수 있는지 정말 신기해했다. 점심을 먹으며 하는 대화의 절반은 알아들을 수조차 없어서 감탄조차 할 수 없었다. 저 자리를 내가 대신할 수 있을까. 나의 투어를 들으러 길게는 12시간씩 날아온 고객들에게 과연 의미 있는 시간을 선사할 수 있을까. 밥이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 모르는 시간을 보냈다.
2월을 갓 넘겼을 무렵, 처음으로 투어를 진행해 보겠냐는 파트장님의 제안이 있었다. 주말 내내 대본을 인쇄해서 읽고, 밑줄 치고, 외웠다. 눈을 감기 전까지 대본을 외웠고,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전날 외운 부분을 읊곤 했다.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싶었지만 떨려서 어쩔 수 없었다. 투어를 처음 시작하는 날은 아침부터 미드를 켜두고 출근 준비를 했고, 투어 전에는 길치인 내가 동선을 까먹을까 봐 공장을 한 바퀴 다 돌았다.
그렇게 첫 투어가 시작되었다. 첫 투어 대상은 사우디에서 온 인자한 부부였다. 부부가 함께 사업을 한다고 했다. 인천공항에서 청주까지 먼 길을 와 잠깐 화장실에 간 사이 영업 대리님과 잠깐 이야기를 나눌 시간이 있었다. 나는 나의 첫 투어라는 것을 그에게 알려 도움을 구할 참이었다. 그래서 그분께 오늘이 나의 첫 투어라고, 잘 못해도 이해해 달라고, 떨리는 마음으로 말했다. 그러자 그 대리님이 말했다.
"에이 그럼 오늘이 제일 잘하는 날이겠네~! 원래 처음에 가장 공들이는 법이거든."
위로의 말이라고 생각했다. 어떻게 처음 하는 사람이 제일 잘할 수 있겠는가. 도와달라고 한 말이었는데 나의 의도는 1도 전달되지 않은 것 같았다. 그래도 벌벌 떨며 시작했던 투어는 그런대로 잘 마쳤다. 너무 외웠던 탓인지 내가 무슨 말을 해야 하나 생각할 틈도 없이 말이 나왔다. 다행히 사우디 부부 고객은 내 말을 귀담아들어 주었고, 감사하게도 내가 준비한 질문만 해주었다. 길을 잃는 일도, 내 엉망진창 투어에 고객이 화가 나는 일도 없었다.
그렇게 그 해만 70번이 넘는 투어를 했다. 50번을 넘어가자 나는 소위 말하는 베테랑이 되어갔다. 회장님의 고객 앞에서도, 큰 거래를 앞둔 고객들과도 서슴없이 이야기할 수 있었다. VIP룸 앞 거울에서 고객이 도착하기 5분 전 세팅을 마치고 셀카를 찍는 여유마저 부릴 수 있게 되었을 때쯤 나는 첫 투어에서 영업 대리님이 이야기했던 말의 의미를 떠올렸다.
그분은 그날의 내가 누구보다 진심이었다는 것을 알았을 것이다. 이 하루를 위해 며칠을, 아니 몇 주를 긴장하고 고민하고 준비했을 거라고. 그러니 그날이 가장 열정적으로 열심히 하는 날일 것이라는 것도 알았을 것이다. 서툴러도 그날 고객을 대하던 나의 태도는 어느 날보다 진심이었을 테니까. 조금 부족해도 열정적인 눈빛이, 그날의 진심이, 그 투어를 제일 잘하는 날로 만들었을 것이다.
새로운 회사에서 나의 첫 프로젝트 앞에서 다시 나는 그날의 영업 대리님의 말을 떠올린다. 비록 사회생활을 갓 시작한 1년 차 때와는 다르게 주말에 단 1분도 회사를 위해 쓰고 싶지 않아 지금도 아등바등하고 있지만. 누구에게나 처음은 가장 떨리는 순간인 동시에 가장 진심인 날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지. 8년 차인 나에게 신입사원인 내가 위로를 건넨다. 처음이니 가장 잘할 것이라고. 너무 걱정하지 말라고.
* 킥오프 미팅: 킥오프 미팅 (Kickoff meeting)은 프로젝트 팀과 고객과의 처음 가지는 모임(미팅)이다. 통상 그 프로젝트와 기타 프로젝트 계획 입안에 필요한 기본요소들을 확정하게 된다. (출처: 위키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