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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갈매기 Aug 09. 2024

슬기로운 놀이터 생활

나는 놀이터가 끔찍이도 싫다. 아이가 걸음마를 떼고 막 바깥놀이에 재미가 붙었을 때는 넘어질까, 다칠까 노심초사하며 하루종일 졸졸 쫓아다니는 게 너무 피곤하고 힘들었다.


혼자서도 잘 다니고, 슬슬 말문이 트일 시기인 24개월쯤에는 놀이터에서 만나는 또래가 우리 딸보다 훨씬 말을 잘하거나 주변에서 아직도 왜 말을 잘 못하느니, 이래라저래라 훈수 두는 사람들 때문에 괜한 스트레스를 받았다. 36개월쯤에는 매일 킥보드나 자전거를 타고 놀이터로 나가는 게 일상이었는데, 어디를 가든 과격하게 노는 놀이터 빌런들이 있기 마련이었고, 그런 유별난 애들로부터 아이를 보호하느라 매번 긴장의 연속이었다.


이제 우리 딸은 혼자서도 잘 노는 씩씩한 아이가 되었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놀이터에 있는 시간이 괴롭고 따분해서 미칠 지경이다. 이유가 뭘까? 친한 엄마들이 없어서? 수다라도 떨면 조금 나아질까? 그런데 모여있는 엄마들의 모습도 그다지 즐거워 보이지 않는다. 나는 깊은 고민에 빠졌다. 슬기로운 놀이터 생활을 위해 무얼 하면 좋을 것인가?



아이가 만 3세가 되었을 때 마땅히 보낼만한 기관도 찾지 못한 채 급하게 새 아파트에 입성을 하게 되었다. 하필이면 유치원 입학시기와 맞물려 난감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나는 보낼 곳이 없으면 집에 데리고 있으면 되지라고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그렇게 나는 혈혈단신에 몸으로 친구하나 없는 낯선 동네에 떨어짐과 동시에 반년이 넘는 기간 동안 가정보육으로 매일 아이와 단둘이 시간을 보내게 되었다.


예전 동네에서는 아파트 단지 내 있는 작은 국공립 어린이집에 아이를 보냈었다. 그때는 하원시간에 마주치는 같은 동네 엄마들과 금세 안면을 트고 친해지기 쉬웠다. 자연스레 놀이터에 들러서 수다도 떨고 아이들이 함께 노는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기도 했었다. 다른 집과 비슷하고 별나지 않게 생활하면 육아는 훨씬 더 편해진다. 하지만 어쩌다 보니 유치원에 보낼 나이에 강제적 홈스쿨링 이라니 참 난감했다.


아이의 교육을 위해 내가 선택한 방법은 여행이다. 덕분에 집순이였던 나도 힐링의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집 밖을 쏘다녀도 결국 마무리는 놀이터로 향하는 아이를 막을 방법이 없었다. 우선, 유치원 하원시간을 피해서 인적이 드문 놀이터를 탐방하기 시작했다. 자주 마주치는 경비아저씨, 여사님, 관리사무소 직원들과 친해지고, 동네 분위기에 익숙해질 무렵 슬슬 북적대는 놀이터로 향하기 시작했다.


아이는 점점 또래 친구들을 찾아 헤맸고 놀이터에서 만나는 아이들을 졸졸 쫓아다니기 시작했다. 우리 딸은 누구와도 친해질 준비가 되어있는 모습이었다. 아이들은 참 순수해서 새로운 것에 항상 관심을 갖기 마련이고 새 친구에 등장에 금세 함께 어울려 놀았다. 문제는 아이들이 아니라 다른 엄마들의 은근한 밀어냄이었다. 아이들끼리 잘 놀고 있어도 금세 엄마들이 다가와 아이를 데리고 자신들의 기지로 돌아가기를 반복했다.

 

마치 전염병 환자를 대하듯 경계하는 모습에 나의 안면근육은 풀릴 생각을 안 했다. 다들 하나같이 아무리 같은 아파트 주민이라도 학부모라는 연결고리가 없다면 서로 친해질 만한 이유가 없다고 판단한 듯 보였다. 그래도 그렇지 고작 5살밖에 안된 어린 여자아이를 있는 그대로 봐주는 게 그리 어려울까? 나도 비록 애기엄마지만 모든 아이들을 다 이뻐라 하진 않는다. 하지만 적어도 우리 애와 놀고 싶어 하는 어린애를 피하진 않는다.


1화에서 내가 아무런 노력을 안 해도 우리 애와 놀아주는 고마운 아이는 아마도 부모가 방치하거나 왕따일 것이라고 했다. 그 말은 즉슨 그런 아이들은 없다는 게 핵심이다. 7세 이하 유아를 아무랑 같이 놀아도 괜찮다고 풀어놓는 부모가 요즘 있느냔 말이다. 적어도 내가 먼저 인사라도 했거나 말이라도 걸거나 하는 노력을 했을 때 놀아준단 소리다. 한마디로 지금까지 내가 어떤 노력도 하지 않아도 우리 애와 놀아준 아이는 없었다는 게 글의 요지임을 밝힌다.



나는 그런 엄마들의 행동이 야박하고 야속하면서 더럽고 치사스럽게 느껴졌다. 그래서 나는 내 나름대로에 방식으로 노력?이라는 걸 해보기로 결심했다. 우선 당장은 기관탐색이다. 아파트를 드나드는 픽업 차량을 유심히 살피고 가장 인기 있는 유치원을 찾았다. 그리고 놀이터에서 무리를 지어 노는 아이들과 엄마들을 관찰했다. 역시나 그 유치원이다. 그렇다면 방법은 하나다. 그 유치원에 아이를 보내는 것이다. 하지만 나는 왠지 선뜻 내키지 않는 마음에 좀 더 고민해 보기로 했다.


일단 어떤 유치원이 되었든 당장은 어디에도 자리가 없었다. 이제 남은 건 학원이다. 5세 아이가 다닐만한 학원은 태권도, 합기도 같은 체육관이 전부였다. 선택의 폭이 너무 좁아 고민스러울 때 나는 어김없이 놀이터로 나갔다. 단복을 입고 있는 어린 여자애들을 유심히 살폈지만 결국 모든 학원을 순방하기로 했다. 아무래도 어린 5세 여자아이를 학원에 보내는 건 조심스럽기에 여자 관장님이 있는 유일한 곳으로 선택했다. 그런데 이게 웬걸? 그 체육관은 아파트 애들이 죄다 다니는 그 유치원 바로 앞이다. 고민할 것도 없이 상담 당일 바로 등록을 하고 돌아왔다.


처음 시작한 학원생활은 정말 만족스러웠다. 아이는 체육관의 막내로 모두의 사랑을 한 몸에 받는 마스코트가 되었고 함께 등하원 하는 언니 오빠들의 관심과 사랑을 듬뿍 받았다. 나 또한, 매일 마주치는 아이들과 친해질 수 있었고, 어느 순간 초등학생들의 골목대장쯤 되는 지경에 이르렀다. 아이러니하게도 엄마들과는 전혀 안 되는 소통이 초등학생들하고는 어찌나 잘되던지 나는 수많은 아이들과 대화를 하면서 느꼈다. 요즘 아이들은 자기 얘기를 들어줄 사람이 간절히 필요하다는 걸 말이다. 마치 나처럼...



합기도 하원 시간에 픽업 차량을 기다리는 엄마는 나뿐이었다. 초등학생만 되더라도 혼자서 충분히 집을 찾아갈 수 있으니 말이다. 나는 학원 아이들이 모여있는 그 시간에 유일한 어른으로서 어린이 지킴이 역할을 나서서 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저런 이야기도 들어주고 날이 더울 때는 물도 주고 아이스크림을 사서 같이 나눠먹기도 했다. 자기 자식에게 잘해주는 원생엄마를 싫어하는 부모가 있을까? 나는 아이들 부모들 하고도 자연스럽게 친분을 쌓게 되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원생 엄마들은 대부분 이미 오래전 놀이터 생활을 졸업한 선배들 뿐이었다. 대신 자기들끼리 놀러 나온 초딩들이 내 주변에 모여들기 시작했다. 연신 이모라고 불러대며 학교에서 있었던 얘기를 하기도 하고 고민 상담을 하기도 했다. 처음에는 같은 학원에 다니는 몇몇 여자애들이 전부였는데 시간이 갈수록 숫자가 늘어났다. 조금은 당황스러웠지만 천진난만한 초딩들 덕분에 나의 지루했던 놀이터 생활이 갑자기 재밌어지기 시작했다.


아이들의 긍정 에너지를 받아서 인지 놀이터에서 웃는 시간도 많아지고 다른 엄마들의 시선도 대수롭지 않게 넘기는 여유도 생겼다. 나는 슬기로운 놀이터 생활을 위해 엄마들이 아니라 아이들에게 집중하는 것이 얼마나 효과적인지 몸소 깨닫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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