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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 기억에 머무는 병

by 시골쥐

할아버지가 계셨던 요양원에는 공주 할머니가 있었다. 항상 곱게 단장한 모습으로 통유리로 된 출입문 앞에 앉아계셔서 예쁜 별명이 생긴 할머니다. 거동이 불편하거나 정신이 또렷하지 못한 분이 많은 곳이기에 할머니는 유난히 돋보였다. 모두가 어려웠던 옛 시절에도 귀한 대접을 받고 살았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어느 날, 늘 앉아 계시던 자리가 비워진 낯선 입구를 지나야 했던 날, 할머니와 꼭 닮은 딸을 마주쳤다. 돌돌 말린 이불과 짐보따리를 보고 짐작했는데, 역시나 비보였다. 조의를 표하고 빈자리의 허전함을 나누다 옛이야기까지 듣게 됐다. 애달프지만 아름다운 얘기였다.

할머니의 남편은 무역회사를 다녔다. 해외 출장이 잦고 길었다. 온 가족이 모여 사는 날이 일 년에 절반도 되지 않아서 할머니가 실질적 가장이었다.
가난하고 부족하던 시절에 남편 없이 자식 셋을 건사하는 삶은 억척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미(美)보다 생(生)에 절박했다.


그런 할머니도 꾸미고 단장하는 때가 있었는데, 할아버지가 돌아오는 날이었다. 그날이 오면 고운 옷을 차려입고 하지 않던 화장을 하고 공항에 마중을 갔다. 예쁘게 맞이하고 싶어서 그랬고, 치열했던 삶의 흔적을 감추고 싶어서 그랬다. 이역만리에서 홀로 고생한 남편을 반갑고 기쁘고 행복하게만 만나고 싶어서 할머니는 공주가 됐다.

매일 고운 모습으로 입구에 앉아 있던 건 할머니의 시간이 그날에 머물렀기 때문이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것도 잊었고, 자기가 몇 살인지도 잊었으나, 반갑고 기쁘고 행복했던 날은 잊지 않아서. 대체로의 기억을 잃었지만 소중하고 밀도 높은 몇 날은 잃지 않아서. 그렇게 아름다운 날 속에 사는 할머니는 매일 공주가 됐다.


치매(癡呆)라는 단어는 일제 강점기를 거치며 사용하게 됐다. 어리석고 어리석다는 뜻이다. 이 단어가 무섭기보다 경멸스럽다. 생각이 과거로 돌아간 사람들을 어리석다고 낮잡는 말이 불쾌하다.

그래서 통용되지 않아도 새 이름을 지어주려 한다. 퇴행을 주요 증상으로 하는 뇌 질환자도 옛 기억 하나씩은 간직하고 있으니, 어리석어진 게 아니라 그때에 살게 된 거라는 뜻으로.


‘행환(幸患)’. 행복한 기억에 머무는 병이다.


일상 단어에서 길어 올린 희로애락, 그리고 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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