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초 에세이]밍밍해진 소주처럼

by 시골쥐

스무 살이 되어 처음 마신 소주는 21도였다. 맑고 투명한 이 액체는 순수한 모습과는 정반대의 맛을 가지고 있었다. 그 맛이 쓰고 따가워서 마실 때마다 인상을 찌푸렸다. 그걸 보면 복학생 아저씨들은 꼭 자기들이 신입생 때 마셨던 23도짜리 소주에 대해 말했다. 그에 비하면 이건 물이라면서.

군대를 다녀오니, 처음처럼이라는 소주가 유행하고 있었다. 19.5도였다. 경쟁 브랜드의 소주들도 모두 도수가 낮아져서 순한 맛 소주 열풍이 불었다. 이제 21도의 알코올을 마시는 사람은 없었다.
하지만 신입생들에게는 20도가 되지 않는 소주도 내가 느꼈던 것처럼 쓰고 따가웠다. 그 맛을 희석하려고 소주 한 잔, 물 한 모금을 번갈아 마셔댔다. 나는 그 아이들에게 ‘라떼의 소주’를 설명하며 거들먹거렸다. 다시 생각해도 꼴값이다.

이후 점점 더 순해지더니 16도 소주가 나왔다. 몇 년 전부터 주로 그걸 마셨다. 대학 때부터 친했던 친구들과 모여 술을 마시다가 스무 살의 소주 이야기가 나왔다. 마침 냉장고에 빨간 뚜껑이 보여서 한 병 마셔보기로 했다. 참이슬 오리지널, 이름처럼 본연의 추억을 떠올리게 해줄 거라 기대했다. 그리고 딱 한 잔을 마신 후에 신입생 때 그랬던 것처럼 벌컥벌컥 물을 마셨다.

“이게 이렇게 썼던가? 혹시 23도 아니야?”
아니었다. 20.1도, 내가 이건 물이라며 거들먹거렸던 소주와 더 가까운 도수였다. 우리는 소주 회사가 오리지널이라 주장하는 기준보다 더 오랜 세월을 살아온 나이가 됐다.
친구들도 하나 같이 물컵에 손이 갔다. 그 모습이 쓰고 따가운 것을 마셨던 그때 같아 웃음이 났다. 결국 한 병을 비우지 못하고 순한 것을 새로 시켰다.

소주가 순해지듯 우리도 순해졌다. 입맛뿐 아니라 성격과 외모, 태도까지 그렇다. 밍밍하게 유순해진 덕분에 우리는 좀 더 편한 관계가 됐다. 더 이해하고 덜 예민해하면서 좋은 것이 늘어나고 불편한 것이 줄어들었다. 다시 예전처럼 찐하게 뜨거우라면, 틀림없이 아무도 그러지 못할 것이다.
순하게 살다가 독해지지는 못하는 거니까,

소주도 인생도.


불안한 어른을 위한 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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