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초 에세이]나의 동승객들에게

by 시골쥐

대학교 앞에서 자취를 한 탓에 생활권이 정문 근처를 벗어나지 못했다. 어느 날 갑자기 그게 답답하게 느껴져서 무작정 시내버스를 탔다. 학교가 버스 종점이라는 우연이 작용한 충동이었다.
그렇게 나만의 특별한 취미가 시작됐다. 종점에서 종점으로 떠나는 버스 여행이었다.

이곳저곳을 두루 거치는 버스 덕분에 도시를 속속들이 알게 됐다. 내가 알고 있던 이 도시는 껍질에 불과했다. 모세혈관처럼 퍼진 도로를 따라 탐스러운 과육 같은 풍경이 곳곳에 숨어 있었다.
하지만 눈에 익은 곳이 많아지면서 금세 재미가 시들해졌다. 그래서 새로운 취미를 하나 더했다. 버스 안 승객들을 관찰하는 혼자만의 놀이였다.

나이와 성별, 옷차림, 앉은 모습 같은 작은 단서들을 모아 그 사람이 어느 정거장에서 내릴지 예상하는 게임을 했다. 나 혼자 머릿속으로 하는 퀴즈였음에도 상당히 흥미진진했다. 어쩌다 맞추기라도 하면 예리한 관찰력에 감탄하며 어깨가 으쓱해졌다. 종점까지 갈 거라 기대하는 사람에게는 은근한 내적 친밀감이 생겼다. 물론, 모두 다 나 혼자만의 감정이었다.

고백하자면, 대체로 틀렸다. 종점까지 가겠다 싶은 사람이 다음 정거장에서 내리고, 곧 내리겠구나 싶은 사람과 동행을 연속하는 일이 빈번했다. 나는 거의 모든 날, 대부분 사람의 목적지를 맞추지 못했다.

‘던바의 수’라는 게 있다. 인간이 유지할 수 있는 사회적 관계 숫자가 정해져 있다는 이론이다.
가족처럼 가까운 관계 5명, 고민을 나눌 만큼 친밀한 관계 15명, 친하지만 감정적 거리가 있는 관계 50명, 가끔 안부를 나눌 정도의 관계 150명. 여기까지가 한 사람이 정서적으로 교감할 수 있는 관계의 최대치다.

버스 투어가 인생과 닮았다.
종점에서 종점으로 향하는 여정이 삶의 시작과 끝이라면, 버스에 탑승할 수 있는 인원이 내 관계의 최대치다. 정거장을 지나며 셀 수 없을 만큼 여럿이 오가지만, 결국 내 범주 안에 들어오는 숫자는 탑승 정원을 넘지 못한다.

오래갈 줄 알았던 사람이 불현듯 하차하거나, 영 맞지 않는 사람과 의외의 우정을 쌓기도 한다. 때로는 혀를 내두를 만큼 싫은 사람과 동승 하는 곤욕을 치러야 할 때도 있다.
시작부터 끝까지 함께하는 사람은 한 명도 없다. 아주 특별한 경우가 아니고서는 누구에게나 불가능한 일이다. 생의 마지막, 혹은 그 언저리까지 함께 하는 사람은 정말 몇 되지 않는다. 마치 종점으로 향할수록 줄어드는 승객수처럼 나이가 들수록 점점 적어진다.

그러한 관계 속에서 내 노선을 나아갈 뿐이다.
스쳐 가는 삶의 풍경을 감상하고, 혼자만의 재미를 찾으며, 수없이 오르고 내리는 관계에 집착하지 않는다. 긴 여정 중 어느 시절을 함께하는 이들에 대한 감사와 친밀감 또한 잊지 않는다. 그렇게 다음 정거장으로 향하며 동승객들에게 혼자만의 바람을 전한다.

평탄한 길만 달릴 수 없는 인생에서 기쁨과 시련을 나눌 동반자가 되어주자고. 함께하는 동안 서로의 불쾌가 되지 말며, 함께 하지 않게 된 시절에는 좋은 기억으로 추억되자고.
그렇게 얼마일지 모를 시간 동안 잘 부탁한다고.

작가의 이전글[30초 에세이]공감; 어른의 자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