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파편

날씨가 좋은 날 함께 걷고 싶은 사람과는

함께 걷고 싶지 않아.

by 박가람




날씨가 좋은 날 함께 걷고 싶은 사람과는 함께 걷고 싶지 않아.


왜냐하면, 나는 오늘 햇살이 얼마나 따듯한지

그리고 그게 덥다고 느껴질 때쯤 부는 바람이 얼마나 시원한지

꽃들은 색깔이 얼마나 많은지 하늘이 얼마나 구름 한 점 없이 선명한 초고해상도인지

하나하나 온전히 다 느끼고 싶고 너도 그걸 나와 같이 느꼈으면 좋겠는데

너랑 있으면 바람이 불면 머리가 신경 쓰이고 햇살이 밝으면 피부가 신경 쓰이고

같이 걷다 네 손등이라도 스치면 바깥의 꽃들보다 훨씬 크게 내 혈관에서 꽃이 피니까.

그게 괜히 민망해서 엉덩이도 조금 뒤로 빼게 되고

거기다가 틈틈이 배에 힘도 주고 있어야 하니까.

얼마나 아름다운지 보여주고 같이 즐기고 싶던 것들보다 너를 계속 보게 되니까.


그러니까 그냥 우리는 바람도 없고 해도 안 뜨는 밀폐된 공간에서 만나자.


날씨가 좋은 날 함께 걷고 싶은 사람과는 함께 걷고 싶지 않아.



뽀송했던 날 걸어가는 교복 커플을 보니

내가 저 교복 커플의 남자 역할이었던 시절이 떠올라 휴대폰에 주르륵 써두었던 글.


우효의 새 노래를 들으니 이걸 써둔 게 갑자기 생각났다.

마음이 어린 시절처럼 몽글몽글해져서.


남자라면 글 속에서 엉덩이를 왜 뒤로 빼는지 알 수밖에 없다.

중학생 때 처음 여자친구를 안고 뽀뽀를 했을 때 그 엉거주춤한 자세가 아직도 떠오른다.

어린 시절 온몸의 혈관이 팡팡 터질 듯이 좋아했던 사람들. 이젠 얼굴도 기억이 안 나네.

어디선가 누구의 엉덩이를 뒤로 빼게 만들고 살고 있나요 다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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