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파편

팔꿈치

파편

by 박가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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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팔꿈치에 로션을 바른다.


샤워하고 거울 앞에 서서 팔꿈치를 거울에 들이밀어 본다.

별 더러움 없어 보이지만 그래도 로션을 발라둔다. 나중에 하얗게 틀지도 모르니까.


내가 팔꿈치에 로션을 바르는 버릇을 가진 건 몇 해 되지 않은 일이다.

이 버릇은 단순한 이야기 하나에서 비롯되었다.

수년 전 만나던 여자친구가 지나가듯 했던 이야기.

자기 친구는 사람을 만나면 가장 먼저 팔꿈치를 본다고 했다.

팔꿈치가 더러우면 왠지 보이는 곳만 깨끗한 사람일 것 같다고.

직접 눈으로 확인하기 어려운 곳이나 남들이 본다고 생각할 수 없는 곳을

가꾸는 사람은 겉과 속이 같은 한결같은 사람일 것 같아서 팔꿈치가 깨끗한 사람을 좋아한다고.


대수롭지 않게 들었던 이야기인데

그날 이후로 그 여자를 만나러 가는 날은 늘 팔꿈치가 신경 쓰였다.

로션을 평소보다 한 번 더 짜는 날은 언제나 그 여자를 만나는 날이었다.

예전에는 그 사람에 대한 생각이 내 하루하루를 꾹꾹 눌러대다 보니 로션도 같이 꾹꾹 짜졌지만

지금은 로션을 짤 때나 가끔 로션과 같이 그 사람 생각이 한두 방울 나온다.

그리고 그 생각조차 팔꿈치에 슥슥 발라 문대다 보면 몇 초 만에 증발해 버린다.


맛있는 걸 먹거나 좋은 곳에 가면 습관처럼 말하던 그 사람의 말버릇이 생각난다.

"이건 영원히 잊지 못할 것 같아." , " 이건 진짜 절대 못 잊을 거 같아."

지금 나에게는 그 말버릇과 팔꿈치 위에만 함께한 시간들이 남아있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니 서로가 주고받았던 많은 선물 중에

가장 좋은 것은 망각이다. 서로에 대한 망각.

망각, 네가 주고 간 것 중에 이건 영원히 잊지 못할 것 같아.

이건 진짜 절대 못 잊을 거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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