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파편들
가난의 상징 연립주택 1층 주민의
최고의 특혜 중 하나는 마당의 시간을 가질 수 있다는 것.
20년을 서로 마주 봤지만 부어진 이후로는 늘 굳은 표정뿐인 시멘트 바닥 위에
오래되었지만 낡지 않은 아빠의 낚시 의자를 펼치고 앉는다.
"앉는다"라고 썼지만 사실 "누웠다"에 더 가까운 자세로.
11월 13일 새벽 3시의 마당은 까맣게 쌀쌀하고 까맣게 조용하지만
그 덕에 까만 이어폰을 귀에 꽂으면 음악이 가진 소리가 네온사인처럼 반짝반짝 색을 내며 들린다.
"들린다"라고 썼지만 사실 "보인다"에 더 가까운 느낌으로. 뭐 이런걸 색청이라고 한다는데
그런 기분이 있다. 이건 내가 아니니까 그 누구도 느낄 수 가없기도 할 것이며
내가 느끼니까 그 누구나 느낄 수 있는 감각이기도 할 것이다.
이렇게 양면성을 인정하는 문장을 쓰면 천사도 악마도 이해시킬 수 있다.
즉 인간을 이해시킬 수 있다. 난 그 점이 좋다. 약아빠진 방식이지만.
노래를 들으며 혹은 보며 낮에는 초록색이었을 마당의 까만 식물들의 잎 사이 사이로 보이는
까만 하늘을 바라보며 아빠의 까만 낚시 의자 팔걸이를 만지작거리면
까맣게 잊고지내던 내 학창시절 아빠의 생일날이 떠오른다.
자동사냥이라는 방식이 흔히 존재하지 않던 그 당시 온라인 게임 시장에서
매크로 익스프레스라는 단순프로그램을 이용해 직접 스크립트를 짜서 24시간 자동사냥을 돌릴 정도로
나는 영악한 어린겜덕후 였고 그 덕에 천년이라는 게임에서 100만 원 가량을 벌어
4년에 한번오는 2월 29일, 아빠의 생일에 70만 원 짜리 최고급 낚시 의자를 사드렸다.
약 12년 전에 사드린 그 의자는 의자회사가 사라진 지금까지도
아빠의 손에 정성스레 고쳐지고 고쳐지며 원래의 모양을 유지하고 있다.
생각해보면 아버지에게 사드린 생일선물들은 시간과 상관없이 늘 그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스물세 살 때 사다 드린 나이키 운동화는 아직도 하얗고.
명절 때만 꺼내입으시는 하얀 셔츠는 여전히 주름 하나 없다.
내가 작년에 낸 책과 올해 낸 책도 이부자리 맡에 새것마냥 새하얀 페이지 그대로 있다.
나의 아버지는 칸트가 말한 날짜 수가 적어 고통도 적은 아름다운 2월에 태어났으나
불행히도 4년에 한 번 있는 2월 29일이 생일이라 다른 2월생보다는 약간 더 많은 고통을 챙겨 세상에 태어났다.
그러나 그 고통들 속에서 행복을 어떻게 소중히 보관해야 하는지 잘 깨달았고.
나는 아버지가 소중히 보관해둔 행복을 보며
사랑을 말로 표현하지 않아도 느끼게 하는 법을 까만 밤 까만 마당에 앉아
온몸으로 하얗게 알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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