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 친구를 만나는 날은 늘 한 시간 일찍 나와서 편지를 썼다
솔직하게 말해서
추운 겨울날 이런 노래를 들으며
연락 올일 없는 고장 난 휴대폰 하나를 애타게 쥔 뒤
아는 사람 하나 없는 나라의 늙은 기차를 타고
타국의 땅을 바다처럼 밟고 표류하고 싶다.
그러니까 나 혼자 오래된 영화 속으로 혹은 노랗게 낡아진 소설 속으로 숨어버리고 싶다.
하루를 정확히 24시간으로 살아가는 사람 말고
장면과 장면, 페이지와 페이지 정도로 쓰며 살아가는 사람이고 싶다.
그러니까 솔직하게 말해서 도망치고 싶다. 이 감정에서.
솔직하게 말해서 너의 단점을 하나씩 세밀히 바라본 적이 있다. 도망치고 싶어서.
나를 난처하게 만들었던 털, 앞니에 묻은 립스틱, 웃을 때 보이는 흰자, 후줄근한 시험기간의 옷들.
하다못해 같이 밥 먹을 땐 이사이를 봤다. 뭐라도 끼어있으면 해서.
그러나 너에 대한 나의 방향성은 늘 기이한 것이라
멀어지려 할 때마다 더 가까워지는 것을 멈출 수가 없는 것이었다.
솔직하게 말해서 나는 자기변호에 약하며 구질구질한건 딱 질색인 사람이다.
그러나 타인을 사랑한다는 건 참 구질구질하며
그 구질구질함을 매번 자기변호해야 자신이 유지되는 일이라
요즘은 내가 나를 설득하기 위해 스스로에게 해주어야 할 말이 조금 많아졌다.
내 지루한 마음은 나이를 먹을수록 엉덩이가 무겁고
어디 눌러앉으면 쉽게 떠나는 법을 모른다.
기쁨은 휘발하고 슬픔은 침전하는 이 마음통은 누가 내게 설치하고 간 건지
밤이 되면 내가 사랑하는 너의 너드한 말투와 술 취한 애교는 다 휘발하고
내가 사랑하는 너의, 슬픈 문젯거리들만 마음속에 침전한다.
그 문젯거리들을 위한 나의 행동은 무엇이 되어야 할지 생각한다. 생각해본다.
하나씩 하나씩 생각해본다. 몇 가지 방법이 있긴 있다.
그중 가장 명확한 두 개의 방법은 사라지는 것과 참아내는 것.
사라지는 것. 그것은 가장 익숙한 방법이다.
나는 그 익숙한 방법을 통해 꾸준히 나를 유지해 왔다.
참아내는 것. 내가 살면서 참아낸 것들을 생각해보면 그것도 그렇게 낯선 방식은 아니다.
그러나 늘 익숙했던 그 방법들 속에 너를 넣어두면 내 마음이 너무 낯설다. 아프게 낯설다.
내 직업은 글 속에 사랑이라는 단어를 유독 많이 쓰고 지우게 된다.
그게 왠지 진부한 거 같아서 최대한 그 단어를 참아내려 노력하는데
솔직하게 말해서 정말 사랑한다.
이건 어떻게 해도 참을 수가 없는 문장이다.
한번 쓰고 보니 쉬이 지울 수가 없게 된 문장이다.
부끄러운 마음에 수백 번 퇴고해 보아도 수정할 수 없는 문장이다.
나는 사라지고 싶지도 참아내고 싶지도 않다.
나는 그냥 조금 솔직하게 말해서 정말 사랑한다.
길게 글을 쓰고 보니 무진기행에 내가 하고 싶었던 말이 다섯 줄로 요약되어 있었다.
대화란 항상 의외의 방향으로 나가버리기를 좋아하기 때문에 이렇게 글로써 알리는 것입니다. 간단히 쓰겠습니다. 사랑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당신은 저 자신이기 때문에 적어도 제가 어렴풋이나마 사랑하고 있는 옛날의 저의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옛날의 저를 오늘의 저로 끌어다 놓기 위하여 갖은 노력을 다하였듯이 당신을 햇볕 속으로 끌어놓기 위하여 있는 힘을 다할 작정입니다. 저를 믿어주십시오.
여자 친구를 만나는 날은 늘 한 시간 일찍 나와 편지를 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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