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파편들
렌즈를 끼고 자면 생각나는 사람이 있다.
나에게 잔소리 같은걸 하지 않는 타입의 사람이었는데
유난히 렌즈를 끼고 자버린 날은 그러면 안된다고 타박하던 사람
내 시력은 0.1 정도로 실제로 렌즈를 안 끼면 눈앞이 흐릿하게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맨눈으로 보이는 흐릿흐릿한 수채화세상이 그냥 마음에 들어서
렌즈를 끼지 않고 살았었다.
나는 렌즈를 그 사람과 헤어진 후부터 착용하기 시작했다.
그 사람과 나는 헤어지고 나서도 간간이 연락을 했었다.
뭐 나쁘게 헤어진 것도 아니고
헤어지는 날에는 헤어진 뒤 마주치면 어색하지 않게 지내기 위해서 서로 연습도 했다.
학교 안이나 길에서 마주치는 상황극을 하면서
지금 생각해도 뭔가 인상깊고 웃겨.
어쨌든 어느 날 전화가 와서 오빠는 자기를 보고 지나쳐도 모르고 그냥 가냐길래
그때부터 렌즈를 끼기 시작했다.
이제 렌즈 끼니까 지나가면 연습했던 대로
어색하지 않게 인사하고 지나갈 수 있다고 말도 해줬다.
그때부터 가끔씩 연락하면 늘 렌즈는 끼고 자면 안 된다고 뭔가
렌즈 선배처럼 엄격하게 말해줬다.
생각해보면 만날 때는 내가 나이가 많다 보니 늘 이래야 한다 저래야 한다 말하는 편이었는데
그게 억울했던 건지 유난히 렌즈의 사용법에 대해서 엄격 근엄 진지했던 것 같다.
그렇게 그렇게 시간은 흘러가고 점점 연락도 적어지고
어느 날부터 연락을 서로 안 하고 지내게 되었다.
연락이 끊긴 뒤로도 가끔씩은 렌즈를 그냥 끼고 자버릴 때가 있었다.
일어나면 렌즈는 끼고 자면 안 된다고 난리 부리는 목소리를 들을 수 있을 것 같아서.
그리고 그 뒤로는 가끔 렌즈를 낀 채 잠들었을 때마다
잠에서 깨면 알 수 없는 상실감을 느꼈다.
그리고 요즘은 렌즈를 끼고 잠들고 일어나면 그냥 생각이 든다.
어떤 생각이 드냐면 언젠가는 렌즈를 낀 채로 잠들고 일어나도
그 사람 생각조차 안 하겠지.
그 사람과 처음 이별했을 때는
눈앞도 흐리고 내 세상도 흐릿해져 버린 기분이 들었다. 삶의 초점이 나가버린 것처럼
렌즈를 끼면서부터는
눈앞은 밝아졌지만 내 세상은 여전히 흐릿하다고 느꼈다.
그리고 많은 시간이 지난 요즘은
그 사람이 흐릿해지는 걸 느낀다.
그렇게 열심히 바라보고 기억하기 위해 노력했던 사람이
점점 안개 속으로 사라지는 기분.
그러나 어떤 기억을 바라보는 눈에는 렌즈가 씌워져 있어
몇몇 좋았던 기억들은 선명히 생각나기도 한다.
사랑이 삶을 스쳐지나간 뒤 사람은 흐려져도 순간은 선명히 남는 것 같다.
좋은 순간이 많은 사람이었으면 싶다.
내가 누군가의 삶을 스쳐지나갈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