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모든 경험이 너를 이룬다
좋은 사람일 필요 없다.
부족하다고 생각할 필요도 없다.
삶의 모든 경험이 '너'를 이룬다.
1편이 나온 2015년에는 재미있는 만화 영화에 그쳤다. 2편이 나온 2024년, 이제 막 고등학생이 되는 사춘기 소녀의 감정들을 귀여운 캐릭터로 타자화시켜 볼 수 있는 한 편의 심리 치료 책이 아닐까. 내 안에 여러 명의 ‘나’가 있는데, 그 여러 명이 제멋대로 움직이면 좌충우돌 하는 삶이 될테고, 그 중 우두머리가 잘 이끌면 물 흐르듯 자연스러운 삶이 될 것이라. 몸은 어른이지만 마음은 아직 사춘기 소년소녀에 머물러 있는 어른들. 특히 불안에 찌든 어른들에게 건네는 위로이기도 했다. 내 머릿속 불안 이에게 마사지와 차 한 잔 건네줄 수 있는 여유를 줘야겠다는 좋은 메시지와 함께.
기쁨보다 불안을 더 많이 느끼는 게
어른이라고
기쁨을 삶의 곳곳에서 수시로 느끼지 못하는 나 자신을 돌아본다. 엄마 뱃속에 있었던 시간을 합해 30년이라는 시간이 흘러 만들어진 나의 자아는 어떤 모습일까. 자아에 뚜렷한 형태는 없다. 영화 속에서 ’이건 라일리 답지 않아‘ 라는 대사가 쏟아진다. 라일리 다운 것. 나 다운 것. 과연 그것을 규정할 수 있을까. 인간이란 매우 복잡해서 언제고 기쁘고 슬프고 불안하고 당황스럽고 까칠하고 예민하고 소심할 수 있다. 저마다의 내재된 경험의 사이클 속에 습관적으로 발생하는 감정의 발현이 반복된다. 그렇게 자아를 형성한다. 경험이 켭켭이 쌓이고 또 쌓여서 나라는 사람이기 때문에 나라는 사람이 되어 간다. 좋은 사람도 아니고, 나쁜 사람도 아니다. 그저 나 일뿐.
감정 안에는 ’컨트롤러‘ 라는 게 있어서 되고자 하는 방향으로 ‘조절’할 수도 있다. 사춘기 라일리에게 찾아온 불안, 부러움과 당황이라는 감정처럼. 우리는 살면서 다양한 감정들의 연대기를 겪는다.
가령, 나의 요가원 원장님은 명상 시간에 나이 많은 남자들에게 쉽게 반항심이 일어나는 자아에 대해 고백하셨다. 요가 명상을 통해서 자신을 깊이 있게 관찰하고, 어린 시절 아버지의 엄격한 가정교육 혹은 차별로 상처받은 마음이 컸음을 알아차리셨다.
상처받은 내면을 알아차리기 전까지는 분노로 인해 스스로를 힘들었다고 하셨다. 그 상처받은 마음을 알아차림을 통해서 조금은 너그러워지고 마음이 편안해지셨다는 이야기는 당시에 깊은 울림이었다. 내 안의 상처받은 내면은 어떤 감정 버튼을 누르고 있는가.
감정의 가속 버튼이 있다면, 완급 버튼도 있다. 습관적인 불안을 멈춰줄 수 있는 STOP 버튼이 있다면 자주 이용해야 한다. 약간의 불안은 예기치 못한 불행을 대비하게 해주는 효능 외에도 노력의 원동력이 되기도 하지만, 대체로 과유불급이다. 감정보다 높은 철학의 시선에서 삶을 영위할 수 없을까. 그래서 어른은 기쁨 버튼을 자주 잊어버리게 되고 감정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기는 어려워지는 게 아닐까. 매일 가슴을 열고 기쁨에게 자주 말 걸어 주고 싶다.
기쁨 옆에 슬픔은 어디 있는지 물어보는 일도 잊어서는 안 된다.
불안이 일어날 때면, 한숨을 돌려 지나친 걱정을 멈추어야 한다. 감정의 요동이 많이 없길 바라면서도 감정에 솔직한 이들을 보면 부럽다. 이 또한 부러움이라는 감정이다. 이렇게 내 안의 감정을 알아차리는 것. 마음 작용의 통제라는 요가라는 수행이다.
내게 묻어 있는 슬픔과 불안이 좋다. 어쩌면 들떠있는 기쁨보다 나는 슬픔이 좋다. 어쩌면 기쁘다가 슬픈 건 견디기 힘들지만, 슬프다가 기쁜 건 인생의 보너스 같아서 마음이 편하다. 슬픔과 불안은 나를 움직이게 한다. 글을 쓰게 하고, 읽게 하고, 몸을 움직이게 한다. 고집 있게 완벽을 추구하게 한다. 그리고 나은 미래를 기대하게 한다. 다른 이와 부러워하면서 닮기 위해 노력한다. 그렇게 삶은 내가 나아가고자 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게 한다.
별 일 없이 지나가는 무더운 여름이 고맙다. 더위에 지쳐 완벽과 기대와 질투를 내려놓는다. 걱정이 아니라, 고민을 하고 충분히 잠을 자겠다. 오늘은 완급 버튼을 누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