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아무것도 아니었음을
스스로 생각하지 못하고 다른 사람이 생각한 결과들을 숙지하는 것으로만 자기 삶을 채우면 다른 사람의 생각을 전파하고 대신해 주는 삶 밖에 살 수 없다.
이는 종속적인 삶이다. 나는 누가 뭐래도 독립적인 삶을 살겠다. 스스로 읽을 줄 알고 질문할 줄 아는 내면의 힘을 세우겠다.
얼마만큼 수고하는 인생이 값진 수고일까. 수고란 삶을 살아가는 방식이자 자아실현의 수단 그리고 가치를 증명하는 태도이다. 하루하루 주어진 것들에 수고를 다하는 삶이 퍽 마음에 든다. 좋아하는 것을 매일 하는 것과 하기 싫은 일을 즐거운 마음으로 하는 것으로 하루를 채운다.
바로 어제 우리 팀 막내의 퇴사 소식을 듣고 적잖이 충격을 받았다. 밝고 싹싹해서 다른 팀에서도 사랑을 듬뿍 받던 막내였다. 2년이 되지 않은 연차에 갑작스레 그만둔다는 소식에 놀랄 수밖에…
96년생 남자였고 새하얀 얼굴에 마른 체형의 미대 출신 J. 바로 내 옆자리에 앉아 종종 수다를 떨고, 다른 팀원들과도 워낙 잘 지낸다고 생각했기에 이렇게 빨리 퇴사를 할 거라는 의심을 전혀 하지 않았다. 퇴사 소식을 전하고는 일주일 동안 발리로 훌쩍 떠나버린 J는 퇴사를 결심하기까지 무슨 일을 겪은 걸까. 다정한 사람이 더 무서운 법이라고 상냥한 그의 뒷모습에 슬픔이 묻어 있었던 걸 모르고 있던 바보 같은 선배였다. 무엇이 그를 힘든 게 한 건지 사실 정말이지 궁금하다.
내가 모르는 타인의 세계는 망망대해라 깊게 알려하지 않았던 나의 매정함은 나를 보호한다. 한편 안도하고 있던 이의 당황스러운 반응에 더 큰 상처를 받는다. 나라는 존재부터가 도넛이다. 가운데 동그란 구멍이 있어 나와 꼭 맞는 동그라미를 만나 채워지기 전까지는 공허하다. 휑하다. 헛헛하다. 그래도 나는 이왕이면 더 큰 도넛이 되고 싶다.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는 자체로 감사할 줄 알고 매무새 있게 일을 마무리할 수 있는 사람이고 싶다. 타인에게 도움을 줄 수 있을 때 비로소 값진 수고로움이라 느낀다.
내가 도와줄 수 있는 것에 세심하게 배려하는 마음으로 누군가의 빈 구멍을 조금이라도 채워줄 수 있다면 그날 하루는 잠을 푹 잘 수 있겠다. 타인이 요청한 도움을 줄 수 없어 곤란한 경우에 미안하다는 사과보단 내가 할 수 있는 다른 도움을 찾아 건네는 것. 최근 힘든 일을 많이 겪어 우울해하던 지인의 일이 잘 풀렸다는 소식에 진심으로 기뻐하면서 따스한 응원의 말을 건네는 것. 미지근하게 데워진 거품 올라간 우유에 적셔진 도넛처럼 달콤하다. 누구나 힘든 살아가는 것, 인내하는 것, 서로 의지하는 마음으로 힘을 내어 우리가 헛되지 않음을 믿고 한 발자국 더 나간다.
퇴사하는 후배의 마음을 돌릴 수는 없었겠지만, 다정한 곁을 내줄 수 없었던 나의 옹졸함에 마음 아파하며 떠나보낸다. 스스로 독립적으로 생각하여 용기 있는 결단을 내리는 모든 이들에게 존경과 경의를. 나만의 생각과 기록에 나다움이 듬뿍이 묻어나는 삶을 묵묵히 걸어가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