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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재자는 왜 전염병의 이름으로 나타났을까

계엄과 <계엄령>의 시간

by seemune


‘계엄’의 그 어떤 자취와도 닿고 싶지 않던 지난봄에, 아름다운 표지에 반해 집어든 책제목이 무려 <계엄령>이었다. 놀랍게도 알베르 카뮈(Albert Camus)의 작품이었고 그의 작품 중에서도 생소한 희곡이었다. (출판된 바 있지만 단행본은 처음) 국내 출간 된 시기를 보니 출판인들의 결기와 분노, 그럼에도 아름다운 책이어야 한다는 의지, 심지어 약간의 위트까지 느껴졌다. 책머리에 작가인 카뮈와 출판사 ‘녹색광선’이 전하고자 하는 가장 주요한 메시지가 ‘사랑’이므로 이 책의 출간을 그 연장선상에서 이해해 달라는 편집부의 글이 있었다. 하지만 이 책에서 ‘사랑’을 읽어내기엔 너무 가까운 과거 대한민국에 계엄이 있었던 터라 그 외의 복잡한 감정이 더 컸다. 12.3 계엄이 없었더라면 과연 이 시기에 이 책이 다시 출판되었을까. 이유야 어찌 되었든 ‘계엄’이라는 폭압적인 단어를 품은 이 책이 제목과는 달리 흥미롭고 즐거운 독서가 되었기에 기록을 남겨둔다.


<계엄령>은 1948년에 초연된 연극을 위해 쓰인 희곡이며, <이방인>이나 <페스트> 같은 카뮈의 대표작에 비해 상대적으로 덜 알려진 작품이다. 카뮈의 또 다른 희곡 <칼리굴라>나 <정의로운 사람들>의 성공에 비해 상업적으로도 비평적으로도 모두 차가운 평가를 받은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프롤로그와 3부로 구성된 이 작품은 1부에서는 혜성의 등장과 마을의 소요 끝에 총독을 물리치고 등장하는 ‘페스트’, 2부에서는 새로운 권력을 잡은 ‘페스트’가 지배하는 사회의 부조리 그리고 이에 맞서 각성하는 디에고로 인해 허점을 보이는 독재의 체계, 3부에서는 디에고를 통해 대변되는 용기와 희생으로 되살아나는 민중과 마을을 그린다.


에스파냐 남단 항구도시 카디스에 혜성이 나타난다. 혜성의 등장이라는 사실 자체보다, 그 사건을 둘러싼 사람들의 소요와 갈등으로 민중이 혼란스러워하는 가운데 총독의 포고령이 내려진다. 포고령의 내용은 혜성 출현을 허위로 받아들여야만 한다는 것. 이 단순한 명령 때문에 사회는 경직되고 불안하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 변화 없음, 관습을 좋아하는 총독은 민중의 소요를 우려하지만, 막료들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며 총독의 비위를 맞춘다.


총독 변화만큼 성가신 게 없어요, 저는 관습을 좋아한답니다! (중략)
총독 새로운 것은 하등 쓸모가 없는 법이죠.
막료들 참으로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새로운 것이란 하등 쓸모가 없는 법입니다.
총독 여하튼 지금으로서는 그 무엇도 움직이면 안 되오! 나는 부동의 왕이니까! (43-45)


혜성의 등장과 함께 시작된 군중의 소요가 한차례 잦아들자 한 남자가 쓰러지고, 의사로부터 ‘페스트’라는 진단을 받는다. 사제는 역병의 이유를 마을의 타락으로 꼽으며 성당으로 들어가 속죄하길 촉구한다. 종말을 외치는 사람, 주술사, 점성술사 등이 각각 자신들의 말을 내뱉고, 판사는 시편을 낭송하며 부인에게 최대한의 식량을 비축해 놓을 것을 요구한다.


판사 주님께서는 나의 은신처요 나의 성채로다. 나를 새 잡이의 함정에서 지켜주시는 이는 주님뿐이다. 그리고 많은 이의 목숨을 앗아가는 페스트에서도!
(중략) *시편 91장 2-3절의 내용 인용
가능하면 최대한 식량들을 비축해 놔. 얼마를 부르든 상관 말고. 최대한 긁어모아요, 부인, 최대한! 지금은 긁어모을 때란 말이오! (판사는 낭송한다)
주님께서는 나의 은신처요 나의 성채로다….


한편 주인공 디에고와 결혼을 약속한 판사의 딸 빅토리아는 서로를 간절히 원하지만 페스트의 발현을 기점으로 갈등을 겪는다. 디에고는 전염병으로 어려움을 겪는 군중 속에서 역할을 다하려 하지만 빅토리아는 디에고의 애정만을 갈망한다. 역병으로 혼란을 겪고 있는 마을에 낯선 남자가 나타나 총독에게 권력 이양을 요구한다. 제복을 입은 전체주의 자체인 - 이름마저 ‘페스트’인 - 남자의 등장은 예상 밖으로 과격하고 거칠지 않다. 총독에게 예의를 갖춰 당신의 자리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강요할 생각은 없고, 법도에 따라 행동하는 것이라고 말하지만 맞서는 총독에게 비서를 통해 말소 작업(명부로 추측되는 수첩에 줄을 그으면 해당자가 사망한다)을 진행한다. 총독에게 마지막까지 존칭을 쓰는 ‘페스트’는 그 말소 작업으로 협박해 총독을 몰아낸다.


남자(페스트) 말씀 중에 죄송합니다만, 당신이 이 유용한 조처들에 대해 기꺼의 동의하며 이는 당연히 자유의지에 근거한 합의임을 분명하게 밝혀주시면 기쁘겠습니다.
총독이 두 사람(남자와 비서) 쪽을 바라본다. 비서가 연필을 입술 쪽으로 가져간다.
총독 물론, 나는 자유의지에 입각하여 이 새로운 합의를 체결한 것입니다.
총독은 웅얼웅얼 대더니, 뒤로 물러서서는 달아난다. 모두가 탈주한다. (64)



전령들이 차례로 나타나 전하는 소식은 모두 ‘자유’와 대척점에 있는 것들이다. 감염자가 있는 경우 대문 중앙에 표식(검은 별)을 붙일 것, 가옥 연금, 식료품 유통 통제와 강제 배분, 통행금지, 고발자 포상, 마지막으로 이 모든 포고령을 종합하는 대화 금지, 즉 침묵이다. 우리가 얼마 전 2024년 12월 3일에 접했던 포고령에서도 놀라울 정도로 비슷한 문장과 단어들이 있었다. 전문을 언급하고 싶지는 않지만 정치활동, 집회 금지, 언론 출판 통제 등 온통 금지하고 통제하는 것들이다.


다섯째 전령 (또박또박 분명히 말한다) 끝으로, 이번 포고령은 앞선 명령들을 종합하는 것이다. 공기를 통한 감염의 예방을 목적으로, 대화 행위 또한 감염의 경로가 될 수 있으므로 거주민은 모두 초를 적신 헝겊을 입안에 항시 물고 있어야 한다. 이는 역병으로부터 보호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거주민들의 신중한 언동 및 침묵에 도움이 되는 조치다. (72)


총독을 몰아내고 집권한 남자의 이름이 ‘페스트’라는 대목에서 작가의 호기로움에 웃음이 났다. 독재자는 왜 전염병의 이름으로 나타났을까. 아직 카뮈의 <페스트>를 읽기 전이라 내가 생각하는 의미 외에 작가주의적 관점에서 다른 함의가 있는지는 알 수 없으나, 다만 전체주의와 전염병의 유사성에 대해 어렴풋이 유추해 볼 뿐이다. 페스트가 카디스를 떠나기 전 마지막 독백에서 왜 전체주의 독재자의 이름이 페스트였는지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 나온다. 이 작품에서는 ‘디에고’ 단 한 명의 각성으로 시스템의 허점을 드러내지만, 그 후 물러나는 페스트는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고개를 숙인 채로 오래 버틸 수 있다고 말한다. 즉, 어떤 조건이 갖춰졌을 때 역병처럼 온 사회에 퍼졌다가 극복되고 또 숨어있다가 또다시 나타나곤 한다는 것이다.


한편으로는 불과 얼마 전까지 전 세계인의 입을 틀어막았던 전염병인 코로나19가 떠올라 섬뜩하기도 했다. 초를 적신 헝겊을 물고 침묵하는 상태가 마스크와 격리를 떠올리게 했기 때문이다. 당시 마스크는 서로 간의 바이러스 전염을 막기 위한 가장 손쉬운 방법이긴 했으나, 얼굴을 가리고 입을 막는 것은 곧잘 표정을 지우고 의견을 잠재우고 의기소침하게 했으며, 양육자의 표정대신 마스크를 보며 자란 어린아이들은 말이 늦어지거나 발달에 문제를 겪기도 했다.


페스트의 집권 하에 비서의 열심과 나다의 부역으로 삽시간에 경직되고 우스꽝스러운 사회로 변모한다. 카디스의 사람들에게 그전에 없던 ‘존재 증명서’를 요구하고, ‘존재 증명서’를 받기 위해 ‘건강 증명서’가 필요하며, ‘건강 증명서’ 발급을 위해 다시 ‘존재 증명서’가 필요하다. 서류, 수치, 호봉, 조항, 표식들로 점철된 비인간적이고 부조리한 사회에서 디에고는 체계의 허점을 발견하고 비서와 갈등한다.


디에고 … 나는 너의 들의 수법을 다 알아챘어. 너희들은 굶주림이나 이병의 고통 따위로 사람들의 시선을 돌려서, 반항하지 못하도록 만드는 거지. 지칠 대로 지치게 만들고, 시간과 체력을 소모시켜서 분노할 여유도 충동도 갖기 못하게 하려고! (중략) 너희들은 이 세상 모든 것을 숫자와 양식에 끼워 넣으면 된다고 생각해 왔어! 하지만 너희들의 그 완벽한 목록에서 들장미와 하늘의 징조들, 여름의 표정, 바다의 포효, 고통의 순간 그리고 인간의 분노 같은 건 찾아볼 수 없지! (비서가 웃는다) 웃지 마. 웃지 말라고, 망할 년. 분명히 말하는데, 너희들은 끝장났어. 너희들이 누릴 수 있는 가장 분명한 승리의 한가운데에서, 너희들은 이미 패배한 거야. 왜냐하면 인간에게는 - 내 눈을 봐 - 너희들이 굴복시킬 수 없는 어떤 힘이, 그리고 두려움과 용기로 뒤섞인, 무모하지만 언제나 승리를 거머쥐는 순수한 정열이 있기 때문이지. 바로 그 힘이 솟아날 것이고, 그때가 되면 너희들은 너희들의 위세가 피어올랐다 허공에 흩어지는 한낱 연기와 같았다는 것을 알게 될 거야.
(중략)
비서 사소한 비밀을 하나 당신에게 가르쳐 주죠…. 당신도 잘 알다시피, 우리의 체계는 완벽해요. 하지만 완벽한 기계에도 자기 결함 은 있는 법이에요. (중략) 내가 기억하는 한, 우리 체계의 결함이란 한 사람이라도 자신의 공포를 극복하고 저항하기만 해도 삐걱대기 시작한다는 거예요. 그렇다고 체계가 멈춰 버린다는 것은 아니에요, 그럴 수는 없죠. 하지만 어쨌든, 삐걱거린다는 거죠. 때때로 작동이 완전히 정지될 수도 있는 거고요. (128-131)


공포를 극복한 한 인간 ‘디에고’와 그를 비롯한 인간들에게 일말의 연민을 내비치는 비서의 위 대화는 이 작품의 핵심 대목으로 꼽을 수 있겠다. 독재자는 강할 수 있지만 소수이고 그 시스템은 취약하며 부조리라는 모래 위에 세운 성이다. 이를 꿰뚫어 볼 혜안이 있는 사람들은 이 시스템을 흔들 수 있는 용기가 있었을 테고, 그 용기가 모여 체제의 몰락을 가능케 한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프롤로그에서 혜성을 둘러싼 ‘디에고’와 ‘나다’의 대화를 살펴보면, 두 사람은 혜성의 등장 이후 내려진 포고령에 대해 대조적인 입장을 가지고 있다. 불합리를 직감하고 행복해지는 것에 힘을 쏟을 것이라는 ‘저항하는 인간’ 디에고에 반해, 불구자이며 술주정뱅이인 나다, 허무를 찬양하는 무(無) 자체인 인간이 전체주의와 만나 얼마나 급속히 독재의 신복이 되는지 비교할 만한 부분이다.


나다 하늘의 희생양이 되느니 공범이 되는 것이 낫겠더라고 (25)
*스페인어로 ‘나다 nada’는 ’ 없음‘ 또는 ’ 무‘를 뜻하는 명사다 (89)


spoiler alert!

3부의 마지막 몇 페이지에 해당하는 결말 부분은 ‘또 다른 결말’이라는 다른 버전의 결말도 함께 실려있어서 흥미로왔다. 원래의 결말은 디에고의 죽음 이후 페스트에 부역했던 나다가 바다에 스스로 뛰어들고, 민중을 대표하는 어부의 독백으로 막을 내린다. 다른 버전의 결말에는 물러났던 총독과 각료들이 돌아오고 나다도 자신의 부역을 정당화하려고 하자 민중들이 총독과 각료 그리고 나다를 바다에 던져버린다. 어느 쪽이든 후련한 결말이긴 하지만, 전염병 같은 전체주의는 영원히 사라지지 않고 조건이 갖춰진 때가 되면 또다시 좀비처럼 고개를 쳐들 것이라는 것이 독자에게 섬뜩한 열린 결말이다.


전체주의에 대한 은유가 큰 축을 이루고 있지만, 온갖 이야기가 흘러넘치는 세상에 살고 있는 나에겐 다소 촌스러울 정도로 직설적이고 정치적인 작품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특별히 흥미로왔던 점은, 판사, 사제, 시장, 총독 등 집단을 대표하는 속성을 지닌 캐릭터들의 양상이었는데, 지금 대한민국에도 카뮈의 <계엄령>에 등장하는 캐릭터와 1:1 매칭이 가능할 만큼 비슷한 인간상들을 쉽게 떠올릴 수 있어 놀라울 정도다. 이 희곡이 창작된 1948년부터 지금까지 얼마나 많은 독자들이(또는 관객들이) 얼마나 여러 차례, 다양한 장소에서 이 같은 감정을 느껴왔을까. 소위 ’ 케비넷‘이라 불리는 약점을 잡히면 순순히 자리를 내려놓고 숨죽여 다음 기회를 노리는 정치인들이나, 상식에서 한참 떨어진 판결을 내리는 판사나, 신을 믿는 건지 자신의 안위에 신을 이용하는 건지 모를 종교인들 등등 지금도 시스템에 숨은 악마들은 어디에나 존재한다.


내가 속한 사회는 때아닌 계엄을 맞아 대혼란인 채로 6개월이 넘는 시간을 보냈고, 지금까지도 수습 중이다. 개인적으로는 때마침 계엄을 맞아 지나치게 몰입한 독서였다. 기억하고 싶지 않은 시간들이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기억하고 기록해야 자유의 방향으로 돌아설 수 있다는 것을 안다. ‘자유’의 편에 있는 사랑, 용기, 다양성, 유연함, 예술, 관용, 합리와 상식, 대화와 토론, 수용 등의 가치가 계엄 즉 반자유, 경직된 사회, 획일, 부동, 금지, 침묵, 명령 덕에 더 귀하게 여겨지는 계엄과 <계엄령>의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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