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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eju Feb 13. 2022

그들에게 집 열쇠를 맡기고 시계를 잃어버렸다

마다가스카르에서 느끼는 헛헛함에 대하여

   1월 초부터 가정부를 고용해서 시간과 에너지를 절약하고 있다. 가정부의 첫 출근날이었다. 마침 레지던스 측에 냉장고 교체도 요청해두었던 터라, 내가 출근한 사이 다수의 레지던스 스탭들이 내 스튜디오에 출입한다고 연락을 받았다. 불안했다. 급하게 책임 매니저에게 문자를 보냈다.

   아이패드와 노트북을 그대로 두고 나왔는데 약간 불안하네요. 내일 다시 와주시면 안 될까요?

   메시지를 보낸 후에야 아차 싶었다. 그들을 잠재적인 위험인물로 느끼고 있음을 여실없이 드러내 버렸다. 매니저는 자신도 현장에 있을 거라며 걱정하지 말라고 나를 달랬다. 믿을 수 있는 사람들에게 열쇠를 맡긴 것이라고 덧붙이면서. 여전한 불안함과 약간의 부끄러움, 그리고 가정부의 손길에 대한 기대감을 동시에 느끼며 집에 가는 시간을 기다렸다.

   퇴근 후 집으로 들어와 현관문을 열어보니 거의 다른 집이 되어 있었다. 호텔처럼 각 잡혀 정리된 침구 위로 가로질러 누워 쾌적함을 만끽했다. 그런데 이상했다. 거울 밑 탁상 위가 허전했다. 메탈시계가 보이지 않았다. 난 집에 도착하자마자 항상 같은 자리에 시계를 풀어두고, 어제의 기억까지 선명했으니 짐작가는 상황이 맞는 듯했다. 그러나 다수의 스탭들이 내 집에 들렸다 간 만큼 시계의 행방을 물어봤자 되찾기는 어려워 보였다. 화가 났다. 매니저에게 어떻게 얘기를 꺼낼지 고민하던 중 집으로 가정부 서비스에 대한 청구서가 도착했다. ​


  청구서를 받아들며 나는 차분해졌다. 일주일에 3번 이용하는 이 서비스에 대한 한 달 요금이 33유로다. 약 4만 5천원이라는 얘기다. 이만한 노동을 이렇게 싼 값에 사도 되는 것인가. 내가 '싸다'고 느끼는 이 느낌 자체도 상대적일테다. 여기 일반 노동자의 평균 월급이 40만 아리아리, 즉 한화로 13만원 정도니까 말이다. 탓해야 할 대상이 달라져 버린 듯했다. 내가 섣불리 레지던스 스탭들을 잠재적 용의자로 생각하고, 누군가는 내 시계를 가져간 상황에 대한 공통의 범인은 이 압도적인 격차가 아닐까 하고.

  처음으로 자본주의가 자연과 닮았다고 생각하게 됐다. 자연의 작용에 선과 악을 말할 수 없는 것처럼, 자본주의도 선과 악을 완벽히 구분할 수 없는 얼굴을 하고 있다. 그 이유는 자본주의란 추상적인 형식일 뿐 실제로 작동하는 내용이란 인간의 욕망이기 때문이지 않을까. 나는 수요와 공급의 법칙에 따라 현지 물가에 알맞게 책정된 가격을 지불했으며, 서로 가격에 합의하여 일어난 이 거래에 어떤 도덕적 판단도 들어설 필요가 없다. 이게 자본주의의 규칙이다. 그러나 어떤 관점을 들이대냐에 따라 이 규칙은 선하다고 말할 수도 악하다고 말할 수도 있다.  마다가스카르 국내적 관점에서는 정당한 가격이 국제적으로 시야을 넓히면 석연치 않게 보이는 것이다.

   자본주의 규칙을 수호하는 사람은 물론 이에 반대하며 새로운 규칙을 짜고 싶어하는 사람 모두 자신의 욕망을 추구하는 사람이다. 도덕적으로 무엇이 더 낫다고 말할 수 없다. 레지던스 스탭들을 잠재적 범죄자로 생각했던 나의 불안, 내 시계를 가져가고 싶었던 누군가의 욕망에 대해 도덕적 판단을 유보하게 되는 이유다. 물론 실제로 그 불안과 욕망을 말과 행동으로 옮긴다는 건 다른 문제이긴 하지만 말이다.

  나는 앞으로  욕망을 계속 추구할 것이다. 자본을 모을 것이며, 동시에  체제의 룰이 나에게  유리하게 변화하는  힘을 싣기도  것이다. 세계의 불평등에 대해서 과도한 부채의식을 가지지 않도록 한다.  욕망을 추구하는 일에 떳떳하고 싶다. 이런 떳떳함이 있어야 위선의 함정에 빠지지 않을  있다고 생각한다. 대신  압도적인 격차가 주는 헛헛함을 기억할 것이다. 자본주의가 없었다면 누릴  없었던 지금의 물질적 풍요, 자본주의에 대한 반성이 없었다면 상상도  했을 복지체제.   가지 지향점을  번에 추구할  없는 데에서 오는 헛헛함이다. 이게 과연 최선일까, 라고 질문하게 되는 헛헛함이다.  헛헛함으로 인해 나는 직접  고민을 해결하기 위해  삶을 바치지는 않을 지라도, 그런 결심을  사람들을 지지하고 응원하게 된다.



   여기서 알게 된 불어 단어가 있다. ‘Inclusion financière’, 한 집단에서 얼마만큼의 인구가 금융체제에 포함되어 있는가를 나타내는 지표라고 할 수 있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은행 계좌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의 비율이다. 마다가스카르 인구의 대부분이 은행 계좌가 없다. 일정 수입이 있는 사람들만 계좌를 열 수 있는 데다가, 계좌 유지 비용도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현금을 집에 보관하는데 도둑도 많다. 투자는커녕 저축 마저 쉽지 않은 이곳의 현실이다.

   결국 나는 책임 매니저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기로 했다. 이제는 귀가 후 액세서리를 모두 금고에 보관한다. 가정부에게 가끔 팁과 함께 종이에 감사 메시지를 말라가시어로 써서 남겨둔다. 그럼 가정부도 나의 메시지에 항상 감사 답장을 남겨준다. 그녀도 선연하게 느껴지는 이 엄청난 격차 앞에 나처럼 아무렇지 않은 척을 하고 있는 중일까? 완벽히 정돈된 깨끗한 집안, 손글씨로 남아있는 다정한 대화, 그리고 믿을 수 없이 저렴한 가격의 청구서. 이 세 가지를 한 번에 생각할 때 느껴지는 헛헛함은 계속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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