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료 Y는 고양이를 두 마리 키운다. 흰 고양이 이름은 우유, 검은 고양이 이름은 콜라다. 콜라는 언젠가부터 내 몸에 자기 몸을 비비적거리기곤 하더니 어제는 앉아있는 내 무릎 위에 올라오기까지 했다. 여전히 도도한 표정으로 내 품에 앉은 콜라는 얌전했다. 손으로 살며시 쓰다듬으니 그르릉 으르렁대는 소리를 내었는데, 그 소리에 내 손길이 싫은가 싶어 나는 바로 손길을 거뒀다.
Y가 말했다.
« 그릉그릉 대요? 웬일이래.
그럼 기분이 좋다는 뜻이에요. »
그 말에 안심이 된 나는 콜라의 고운 털을 다시 쓰다듬기 시작했다. 내가 너의 뜻을 오해했구나, 생각하면서. 고양이를, 또 그 중에서도 고양이 '콜라'를 알아가는 일에 오해와 발견이 필요했다.
타인을 발견하는 일은 언제나 이런 과정을 지나쳐 왔다. 마다가스카르에서 수많은 타인들을 만났다. 처음 마다가스카르에 도착했을 때는 나도 타인들도 서로가 어떤 사람인지를 파악하는 탐색전의 시기가 있었다. 그 시기를 지나며 나는 발견하고 싶은 타인과 그렇지 않은 타인을 알게 되기도 했다.
그러나 발견하고 싶은 타인이라고 해서 두렵지 않다는 건 아니었다. 내 세계가 그 타인을 밀접하게 마주함으로써 넓어지기를, 그 타인과 서로의 세계를 알려줄 수 있기를 간절히 원하기도 했지만, 실제로 그렇게 되어버리는 게 위험하게 느껴졌고 그래서 피하고 싶기도 했다. 새로운 음식을 먹고 새로운 장소에 가고, 정처없이 걷다가 낯선 상점에 들어가거나 길을 잃어버리는 것 등. 새로움을 좋아하는 나는 인간관계에서만큼은 꽤나 보수적인 사람이었다. 그 세계를 발견하고 싶어 뛰어가다가도, 중간에 더는 가지 말라며 나 자신을 붙잡곤 했다.
지금은 주변인들과 하루 종일 같은 공간에서 시간을 보내며 숱한 오해와 발견들로 관계가 진행되었고, (S의 표현에 따르면 관계에 '주름'이 많이 졌달까) 덕분에 서로의 캐릭터를 파악하여 적절한 거리를 찾았다. 친밀도와 애정도는 놀랍게도 다른 방향으로 움직일 수 있었고, 친밀하다고 하여 내가 이 사람을 더 좋아하게 되는 것도, 그 반대의 경우도 아니었다.
고양이 우유는 겁도 많고 소심해서 놀이 시간이나 간식 시간에도 자주 깜짝깜짝 놀라 모습을 감추곤 한다. 자주 쇼파 밑에 움크리고 앉아 나를 바라보며 경계태세를 취하고, 주인인 Y가 품에 안아줘도 종종 싫은 소리를 낸다. 우유는 다리 한 쪽에만 무늬가 있다. 하얀 두 다리에 어쩜 저런 무늬가 박혀 있게 되는 걸까 감탄하게 한다. 콜라는 가끔 내게 얼굴을 들이대고 점프하여 내 무릎에 올라와 내 얼굴을 빤히 바라본다. 그럼 나도 그 눈을 깊숙이 바라보고 눈을 깜빡이기도 하며 콜라와 그 순간을 재밌게 논다. 이런 콜라에 대한 애정과 우유에 대한 애정의 내용이 다르다.
관계의 양상과 질에 대하여 내가 경험으로 알고 있는 건 아주 작은 데이터베이스일 뿐이다. 누구를 만나든지 난생처음 겪는 관계가 시작된다. 이 지구에 사는 모든 사람이 유일무이하듯이 어느 누군가와 맺는 관계도 유일무이하다. 그래서 그 관계에서 내게 느껴지는 낯선 감정, 당혹스러움, 새로운 양태의 애정까지도 모두 유일무이한 거라고. 어떻게 보면 사람처럼 관계도 서둘러, 함부로 규정하지 않는 것이 그 관계를 소중히 하는 선택이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하게 됐다. 그냥 그런 거라고 인정하면서. 관계는 우연이나 상황에 나부낀다. 얄궂게도 내가 통제할 수 없는 상황에 의해 감정이 증폭되고 사그라들기도 한다. 숱한 오해와 발견도 있다. 말 그대로 '어쩔 수가 없는' 요소들이 있기 마련이다.
다시 콜라와 우유를 만나도 나는 재밌게 놀테다. 콜라에겐 적극적으로, 우유에겐 조심스럽게 다가가면서, 또 그날 새로워진 콜라와 우유를 다시 발견하면서 말이다. 그게 콜라와 우유와 내가 맺은 관계 그리고 그 둘에게 각각 내가 품고 있는 유일무이한 애정을 축복하는 일이라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