끌어당김, 세번째

그럼에도 불구하고 천복

by 루빈

어느새 2달이 넘는 시간이 지나버렸다. 마지막 글을 업로드한 날짜에서. 그동안 나는 책 한 권을 번역했고, 짧은 마감을 2차례 더 했다. 그리고 끌어당김의 세 번째 주제에 대한 글을 쓰려고 노력했다. 책 한 권을 추천하려고 하다가 다른 책으로 바꾸고, 책이 아니라 어떤 개념을 소개하는 것이 더 낫겠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끌어당김은 결국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에 대한 문제다. 오늘 이 글에서 소개할 개념은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을 의미하는 단어’, 바로 천복이다. 나는 천복이라는 단어를 김형경 작가의 <천개의 공감> 이라는 책에서 처음 접했다.


잃어버린 진정한 삶을 되찾는 방법은 천복을 기억하는 일이다. 천복이란 우리가 억압하고 외면해 온 감성, 직관, 자연, 신비주의의 영역에 속하는 덕목이다. 우리가 이번 생에서 타고난 소명, 그것을 완수할 역량과 자질, 운명에 내재된 비밀, 생에서 진정으로 원하는 것 등을 포괄한 단어다. 융 학파 정신분석학의 세례를 받은 신화학자 조셉 캠벨이 제시한 개념인데 번역 과정에서 이윤기 선생이 천복이라는 멋진 단어를 골랐다.


천복의 원어는 bliss라고 한다. 조셉 캠벨은 <신화의 힘>에서 bliss라는 개념을 아래와 같이 소개한다.


천복은 산스크리트어에서 배운 것이다. 산스크리트어에는 이 세상의 가장자리, 즉, 초월의 바다로 건너뛸 수 있는 곳을 지칭하는 말이 세 가지 있다. 즉 사트, 취트, 아난다가 그것이다. 사트라는 말은 존재, 취트는 의식, 아난다는 천복 혹은 황홀을 뜻한다. 이걸 공부하며 나는 이런 생각을 했다.

“내 의식이 제대로 된 의식인지, 아니면 엉터리 의식인지 모르겠다. 내가 아는 존재가 제대로 된 존재인지, 아니면 엉터리 존재인지 모르겠다. 그러나 내가 어떤 일에 천복을 느끼는지 그것은 안다. 이 천복을 물고 늘어지자. 이 천복이 내 존재와 의식을 데리고 다닐 것이다.”


끌어당김과 천복을 연결하면 제법 간단해 보이는 공식이 나온다. 1. 자신의 천복이 무엇인지 깨닫는다/찾는다. 2. 천복을 따라간다. 천복에 머무른다. 천복을 물고 늘어진다. 천복을 되살리기 위해 내가 그동안 했던 일 중 하나는 꾸준히 모닝페이지를 쓰는 것이었다. 나의 모닝페이지에는 ‘작가가 되고 싶다’라는 말과 ‘이런 것도 글감이 될 수 있을 것 같다’라는 말이 되풀이된다.


글을 쓰는 것이 나의 천복이길 바라지만, 내게 다른 천복이 있다면 그것을 발견하고 따라가고 싶다고도 생각한다. 천복을 찾는 과정에서 ‘이것이 나의 천복이다’라고 밀어붙이는 것만큼이나 ‘더 많은 가능성을 열어두는 것’ 또한 중요하다고 믿기 때문이다( 더 많은 가능성을 열어두는 것에 대해서는 다른 글/다음 기회에 이야기하기로 한다). 하지만 글쓰기를 나의 천복으로 삼았다고 해서 당장 글이 술술 써지는 것은 아닌 듯하다. <신화의 힘>에서는 이 문제를 다음과 같은 일화로 설명한다.


남학생들에게 교양과목을 가르칠 당시, 진로 때문에 고민하는 학생들과 이야기를 나누곤 했다. 어떤 학생이 와서 “저도 작가가 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십니까?”라고 묻는다. 그러면 나는 이렇게 대답한다. “모르겠네, 남들이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는 절망 속에서 10년이고 20년이고 기다릴 수 있겠나? 아니면 대뜸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고자 하는가? 세상이 뭐라고 하건 자네가 정말 좋아하는 것만 붙잡고 살면 행복하겠다 싶거든 그 길로 나가게.”


작가가 될 수 있는가의 문제는 어떤 선생님이나 멘토가 판단하거나 결정하는 것이 아니다. 꾸준히 쓰는 것, 꾸준히 노력하는 것. 절망과 기다림을 견디는 것, 결국은 나의 의지와 끈기가 정하는 일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쓰는 삶이 더욱 행복한 사람은 쓰게 될 것이다. 나 역시 그럼에도 불구하고 쓰고자 한다. 글 앞에 내가 한없이 작고 초라해 보이는 날들이 계속되는 것 같더라도.


현생의 마감에 쫓기며 자주 나를 질책했다. 왜 글을 쓰지 않느냐고. 쓰지 못하느냐고. 1주일에 1번 글쓰기가, 2주에 1 번, 3주에 1 번, 몇 달에 1번이 되는 날들을 지켜보며 제법 속이 쓰리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글을 쓰는 ‘것만 붙잡고 행복하겠다 싶거든 그 길로’ 가는 것이다.


그간 올림픽 경기를 보며 문득 이런 생각이 스쳤다. 실수하지 않고 매끄럽게 잘 해내는 것이 물론 좋다. 하지만 실수하고 나서도 흔들리지 않는 모습, 경기가 잘 풀리지 않고 힘들어 보일 때에도 끝까지 묵묵하게 해내는 모습에 더 크게 마음이 움직이고, 더 많이 응원하고 싶어졌다. 어째서일까? 그냥 잘하는 것이 더 좋지 않은가?

아마도 그건 그냥 잘하기만 사람은 현실 속에 존재하지 않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실전에서 완벽한 기량을 선보이는 사람도 연습하는 과정에서 수많은 시행착오를 겪었을 것이다. 선수들, 그리고 수많은 우리 앞에 주어진 현실은 실수나 좌절 같은 것이 전혀 존재하지 않는 게임이 아니다. 오히려 실수나 좌절, 시련, 우여곡절 투성이에 가깝다. 그러니 계속 잘하고 잘 풀리는 상황을 기대하기보다는 넘어져도 다시 일어나고, 잘 안 풀리는 것 같아도 묵묵히 계속 하는 힘을 키우는 편이 보다 현실적인 선택일 것이다.


글쓰기 앞에서 아등바등하는 나에게 묻는다. 그 일이 너의 천복이라고 생각해? 그렇게 믿는다면 가끔, 아니, 자주 힘들고 지치더라도, 계속 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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