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의 모닝페이지

다 이렇게 시간과 양을 쌓아야 되지

by 루빈


어제의 상주. 그냥 산에서 풍경을 찍는데 편안해지고 좋았다. 코로나 블루니 어쩌니 해서 세상은 시끄러운데 나무는 묵묵히 제 자리를 지키며 자라고 있다. 밖에서 나는 마구 휘둘리고 부딪히고 짜증나고 한심하다고 느끼는 일이 잦은데, 안에 있는 나의 무언가는 또 자라나고 있다. 어떤 상황에도 흔들리지 않고 조금씩 자라나는 것이 있었으면 좋겠다. 모닝페이지로 흘러나오는 나의 모습도 조금씩 쌓이고 있다. 그 쌓임이 자람이 되고, 채움이 되길 바란다.

– 2020년 4월 29일

2020년의 모닝페이지에서 가장 눈에 들어오는 부분은 상주에 오고 갈 때 쓴 기록이다. 우리 집은 상주에 호두나무를 키우고 있다. 코로나가 세상을 뒤덮던 2020년 봄, 상주에 간 나는 말로 설명하기 힘든 감동을 느꼈고, 그 느낌을 다음 날 아침 모닝페이지에 주섬주섬 적어보기도 했다.


처음 상주에 나무를 심던 때가 떠올랐다. 이 나무들이 잘 자랄까, 정말 호두가 열릴까 싶었다. 그러다 몇 년 동안 현생의 소소한 옥닥복닥함에 치여 나무를 잊었다. 직접 심은 나무였는데도 말이다. 하지만 나의 무심함이 무색하게 나무는 어느새 풍성해져 있었다. 누가 알아주든 알아주지 않든 나무는 제 할 일을 하고 있었다.

더불어 ‘나는 내 할 일을 하고 있는가?’라는 질문도 던져보았다. 나는 나무처럼 묵묵히 자라나 어느 날 푸르게 펼쳐질 무언가를 쌓고 있을까?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든, 알아보는 사람이 아무도 없든 그저 묵묵히 나의 노력을 쌓아 올리고 있었을까? 쉽사리 ‘그렇다’라는 대답이 나오지 않았다.

특히 ‘그저 묵묵히….’ 라는 말에 이르면 고개가 숙여진다. 나는 전혀 묵묵하지 못하다. 조금만 힘들어도 속상해도 팔딱팔딱 뛰며 주변에 하소연을 하고 모닝페이지에도 비뚤어진 생각과 말을 한가득 쏟아내기에 바쁘다.

내가 열심히 노력한 일을 누군가 인정해주지 않으면 서운하다 못해 억울할 때도 있다. 이래서야 나무처럼 푸르게 자랄 수 있으려나? 채우고 자라는 데 쓰일 에너지를 화내고 짜증 내는 데 소진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말없이 제 자리를 지키며 자란 나무들이 아름답다고 느꼈다. 그 드넓음을 배우고 싶었다. 그러다 얼마 전 한 텔레비전 프로그램에서 나무처럼 아름답고 드넓은 사람을 보게 되었다. 역도로 세상을 제패했던 장미란 선수였다.


“우리 일상은 누가 알아주고 격려하는 일이 많이 없잖아요. 그럼에도 꾸준히 열심히 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닌 것 같아요. 그래서 제가 학생들한테도 ‘보이지 않는 걸 매일 열심히 하고 포기하지 않는 건 너무 대단한 일이다’ 그렇게 말하면서 저한테도 말하고 있는 것 같아요. 아, 맞아, 그런 거지. 다 이렇게 시간과 양을 쌓아야 되지. 저절로 되는 건 없지. 저절로 되는 건 이상하지. 이런 생각을 해요.”


– 유퀴즈, 장미란 편 중에서

나는 잘 모르고 변변히 해 준 일도 없지만, 나무도 저절로 자라지는 않았을 것이다. 사람의 손길이 닿았을 테고 적절한 햇빛과 흙, 바람과 공기도 나무의 자람을 도왔을 것이다. 나무는 그렇게 시간과 양을 쌓아가며 컸을 것이다.


4월 29일의 나는 ‘내게도 나무처럼 자라고 있는 것이 있을까?’라고 물었다. 그때 떠오른 것이 모닝페이지였다. 모닝페이지에서 나는 화도 내고 누군가를 탓하고 나만 억울하다고 하소연을 늘어놓기도 한다. 하지만 2020년의 모닝페이지에서 그랬듯 어떤 날은 뭉클함에 젖고 그 뭉클함에서 비롯된 감상을 적기도 한다.

나의 모닝페이지는 결코 잠잠하거나 묵묵하지 않다. 시끄럽고 정리도 안 되어 있고 글씨도 뒤죽박죽 날림이다. 하지만 나무 그리고 장미란 선수와 공통점이 있다. 시간과 양을 쌓고 있다. 꾸준히 열심히 하고, 포기하지 않는다. 때로 바쁘거나 게을러져 멈추는 일이 있더라도 꼬박꼬박 되돌아온다. 이제 모닝페이지를 쓰는 시간이 가장 나 다운 시간이라고 느낀다.


모닝페이지는 내게 무엇을 주는가? 내 이야기를 들어준다. 그냥 묵묵히 들어준다. 그리고 몇 년이 지나 나 스스로 알게 한다. 내가 사소한 데 너무 얽매였구나, 다른 사람을 미워하고 그 사람에게 화내면서 스스로 나를 힘들게 하고 있었구나.


들어야 할 짐이 아닌데 굳이 들고서 무겁다고 씩씩거리고 있었구나, 화가 났던 게 아니라 상처를 받은 거였구나, 여기가 예전에 상처받은 데라 건드리기만 해도 아프고 괴롭구나 하는 것들을.


그러면서 새삼 느낀다. 모닝페이지 앞에서는 그냥 솔직하기만 하면 된다는 것을. 솔직한 날 것의 나를 만나는 시간이 모닝페이지 앞에 마주 앉은 시간이구나 하고.


그렇게 모닝페이지는 내게 긴장을 풀고 거추장스러운 짐을 내려놓게 한다. ‘하고 싶은 말 다해. 괜찮아’라고 한다. 아침마다 모닝페이지를 채우는 나의 노력이 내 마음이 편히 쉬어 갈 자리를 만들고 있다.

나의 끄적거림으로 가득 찬 노트들이 무성한 나무 그늘처럼 편안한 공간이 되었다. 내 손으로 한 땀 한 땀 시간과 양을 쌓아 만든 공간이다. 다시 한번 중얼거린다. 다 이렇게 시간과 양을 쌓아야 되지. 저절로 되는 건 없지.

상주 2016.JPG 2016년의 호두나무.


상주 2020 2.jpg 2020년의 호두나무. 이렇게 풍성해졌다.


상주 2020.jpg 열매까지 달렸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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